한국에 돌아가기까지 38일이 남았다. 프랑스에서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약 1년간의 체류를 정리할 시간이 38일 남은거다. 서서히 나에게도 '마지막' 순간들이 찾아오고 있는데, 처음으로 맞은 '마지막'은 종강이었다.
지난학기에는 Faculté de Science de l'homme(우리나라의 인문대)에서 불문과 전공 수업을 들었고, 이번 학기에는 Faculté de Droit et Science politique(우리나라의 법대와 정치대를 합쳐놓은...법정대?)에서 정외과 복수전공 수업을 들었다. 프랑스에서 총 7개의 수업을 들었는데, 가장 재밌었던 과목은 지난학기에 들었던 Linguistique générale(일반 언어학)이었다. 한국에선 언어학 하기 싫어서 일부러 문학수업만 골라들었는데, 들어보니 의외로 재밌더라. 터키어, 스와힐리어처럼 생소한 언어도 형태소로 나눠보며 직접 문장도 만들어보는, 아마 한국에서는 못할 드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과목은 이번 학기에 들었던 Droit de l'union européenne(유럽연합법). 유럽연합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법'을 배우겠다고 뛰어든게 애초에 잘못이었다. 지금도 사실 내용이 이해가 안간다. 프랑스 애들은 다 이해한걸까? 걔네에게도 어려운 과목이었을거다. 그랬으면 좋겠다. 심지어 이 과목은 교수님이 시험때 불불사전만 쓸수있다고 했다. 으악!
수업을 듣다가 교실을 멀찌감치서 바라보면(어디에 앉아있던 눈을 가늘게 뜨면 된다. ~.~ 이렇게) 그 풍경 자체가 나에겐 참 즐거웠다. 훈훈하게 생긴 프랑스 애들이 앉아서 맥북을 두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프랑스 영화 속에 들어와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눈이 즐거웠던 거구나. 애들이 시끄럽게 떠들때면 교수님들이 'S'il vous plaît('제발'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혹은 'merci(원래는 '고맙다'의 뜻. 아마 너네 이렇게 떠드는거 이제 충분히 들었다, 정도의 의미인거같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애들은 다 함께 대답하는거다. 'De rien'(천만에요).
그리고나서 난 내 손에서 뭔가를 발견하곤 했다. 폭풍 필기를 한 탓에 파랗게 물들여진 새끼 손가락 마디.
한국에서 수업들을땐 노트북으로 필기를 해서 손가락에 펜 잉크가 묻을 일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내가 늘 쓰는 펜은 빠르게 마르는 젤 펜이라, 손에 묻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는 일제 필기구가 비싼 나라다. 나는 까르푸에서 12개들이 BIC 볼펜 한 꾸러미를 사서 썼다. 볼펜 자체는 나쁘지 않았는데, 정신없이 필기를 하다보면, 새끼 손가락 마디가 볼펜이 되는거다. 나는 정말로 새끼손가락 마디로 글씨를 써보기도 했다. '으악'.
아마 한국에 돌아가면 난 다시 노트북으로 필기를 할것이다. 그리고 한자루에 천이백원 하는 일제 젤펜을 사서 쓸 것이다. 프랑스에서 쓰다 남은 BIC볼펜은 아마 친구를 주고가거나, 기념품으로 한두개 가져와서 집에 굴러다니게끔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엔 속사포처럼 프랑스어를 쏟아내는 교수들도 없다. 그러니 내 새끼 손가락 마디가 파랗게 될일은, 더 나아가 내 새끼 손가락 마디가 볼펜이 될 일은, 이제 없다.
종강
이구나.
집에 가던 길에 물끄러미 바라보며 알수없는 흥분을 느끼게 한, '그래도 프랑스에 잘 왔지' 이런 생각 하게 만든 그라데이션된 하늘 색. 같은 처지의 교환학생들끼리 서로의 필기를 보며 말없이 내뱉었던 한숨. 수업이 끝나고 필기를 빌리러(구걸하러, 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서 개인적으로 참 고맙게 생각한다. 프랑스 대학은 절대평가라 그런지 애들이 필기를 잘 빌려준다. 아니면, 프랑스사람들은 '내 수고'를 남에게 주는 것에 대해 그렇게 껄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일수도.) 다니며 '나는 교환학생인데, 수업을 다 필기하기 힘드니 너 필기를 좀 빌려주렴', 기계처럼 뱉어내던 문장 하나.
그리고 또,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파란 내 새끼 손가락 마디.
종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