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9일. 여행 첫째날
10개월 정도를 백수로 지내던 나는 12월 어느날, 체질에 너무나 잘 맞는 백수 생활을 마무리짓고 다시 월급 노예 생활을 시작해도 좋다는 기쁘고도 슬픈 통보를 받게 된다. 입사 예정일까지는 약 3주 정도가 남아있었다. 이 때 아니면 당분간 장거리 비행이 필요한 여행은 힘들겠지 싶어서 핑계 좋게 여행을 또 가게 됐다. 이번엔 그린란드에 가야겠다 싶어서 비행기표를 검색했더니 심각하게 비쌌고, 환승도 너무나 여러번 해야했다. ㅠㅠ 잠시 고민했지만, 내 흠 많은 성격엔 그래도 몇 가지 장점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포기가 빠르다는 거다. 그래서 그린란드는 5분만에 포기했다. 그 다음으로 어디를 가고 싶은지 생각했고 답은 어렵지 않게 튀어나왔다.
뉴욕에 가고싶어!
나는 미드를 엄청 열심히 보는 사람인데, 살면서 한 번도 미국 땅에 가본 적이 없다. 미 대륙은 물론이며 그나마 한국에서 가까운 미국령인 괌에도 가본 적이 없고, 하다못해 미군 용산 기지에도 들어가본 적이 없다(들어갈 일도 없었음ㅎㅎ...).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지만 난 사실 미국이 괜히 익숙하고 친숙한 기분이 들었다. 프렌즈, SATC, 그레이아나토미, 모팸, 빅뱅이론, 수츠 등등의 미국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 수많은 미드로부터 반복 세뇌당한 결과다. 그리고 사실 미국에서 영화는 또 얼마나 많이 만드는지 솔직히 미국 안 가봤어도 우리나라 사람들 다 미국 풍경에 아마 익숙할 거다. 그만큼 익숙한데도 실제로 가본 적이 없어서 사실 더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에 가고 싶었다. 그 중에서도 뉴욕에 가고싶었다.
급하게 항공편을 찾아보니 시애틀을 경유하는 델타항공이 눈에 띄어서 항공권도 비교적 저렴하게 구했다. 문제는 숙소였는데 알고보니 연말~연초 시즌은 뉴욕의 최성수기라 호텔 값이 정신이 나가있었다. 한인민박 최대한 피하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숙소비를 아끼기 위해 호텔과 한인민박을 섞었다. 그 와중에 갓 수능을 마친 뽀송뽀송한 19살 사촌동생과 함께 떠나게 됐다. 둘 다 ESTA 인증을 출국 며칠 전에서야 급하게 받았고, 심지어 사촌동생은 여권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받느라 하루 전(...)에 받았다. 내 여행은 그냥 어쩔 수 없이 시작부터 빡센가보다. 출국 하루 전인 28일, 나란 멍청한 사람은 29일이 아니라 30일 출국인줄 알고 환전하면서 멍때리고 있다가, 환전금액을 다시한번 확인해보다 그제서야 출국이 당장 내일인 29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 전에 깨달았으니 망정이지 당일에 알았으면 ^^... 돈 날리는 방법 참 여러가지 있구나 싶었겠지. 어쨌거나 나는 무사히 시애틀 경유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다시한번 실감하는 내가 스스로 터득한 내 인생의 짧은 진리지만, 나는 나 자신을 누구보다 믿어선 안 된다.
뭐, 무사히 공항에 왔으니 그럼 된 거 아닌가요. 처음 타보는 미쿡 비행기다. 헬로우?
델타항공은 기내식은 조금 부실하지만 커피만큼은 스타벅스를 준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꽤 감각적으로 보이기 위해 시도한 부분이 눈에 띄어서 나름 즐거웠다.
그러나 스타벅스 커피도 장거리 비행 후 인간의 좀비화를 막지는 못한다. 레벨 10이 완벽한 좀비라고 치면, 나는 약 레벨 5 정도의 좀비 상태로 시애틀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미국 입국 심사는 매우 싱겁게 끝났고(표정에서부터 지루함이 느껴지는 입국 심사관은 우리가 미국에 체류하는 날짜를 보더니 너네도 뉴욕에서 볼드랍 볼거니? 한국에도 볼드랍같은 행사하면서 새해 축하하니? 근데 너네는 음력으로 세지않아? 등의 매우 입국과는 상관없는 질문을 주로 던졌다), 레이오버를 하기 위한 절차는 더더욱 간편했다. 그냥 가방만 한번 더 컨베이어 벨트에 실으면 끝. 델타 항공을 이용해 시애틀에 레이오버하는 방법은 네이버 뉴행디 카페에 내가 매우 자세하게 후기를 올려두었으므로 블로그에 또 쓰고 싶지는 않다. 귀차나....
어쨌든 시애틀 도착! 공항에서 시내까지 이어주는 link light rail 을 타고 시내로 간다. 우리는 시애틀에서 약 10시간 정도 시간이 있었다.
West lake가 가장 번화가인 것 같다. 여기서 내리라고 하길래 여기서 내렸다. 처음 보는 미국의 길거리다.
우리의 목적지는 파이크플레이스 마켓이다. 시애틀의 재래시장 같은 곳이라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에 하나고, 무엇보다 여기에 스타벅스 1호점이 있다고 한다.
조금만 걸으니 금방 마켓이 나타났다!
나는 시장이 무조건 좋다.
실내에는 이렇게 상점이 들어와있는데 사실 그렇게 볼만한 상점들이 있는 것 같진 않다. 무엇보다 나랑 사촌이는 배가 고팠다. 그래서 아마 수전증이 다시 찾아온거겠지....
그냥 여행 첫날이고 해서 신기해서 이것저것 다 찍었나보다.
밥부터 먹어야겠다. 장거리 비행이 투척한 엄청난 피곤함 + 시차 + 공복의 3중고가 겹쳐서 매우 힘들었다. 시장엔 대부분 노점 식으로 먹는 식당들 뿐이어서, 우리는 그냥 유명한거 다 필요없고 실내에 따뜻하게 앉아서 먹기로 했다.
파이크플레이스에서 조금 더 시내쪽으로 나가는 골목에서 발견한 어떤 허름한 피자집에 무작정 들어갔다.
피곤해................그런데 날씬 또 왜이렇게 좋은건가요.
사실 우리는 주문하고 우리 옆 테이블에서 먹는 엄청난 사이즈의 피자를 보고 조금 쫄아있었다. 천조국의 스케일을 경험해보지 못한 무지한 자들은 이미 피자에 파스타샐러드까지 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절반 이상을 남기게 될 것 같아 슬퍼하던 우리는, 우리가 시킨 피자는 그 피자랑은 다른 이탈리안 스타일의 작은 사이즈임을 발견하고 안도했다. 심지어 맛도 있었다.
밥을 먹으니 한결 나아졌다. 피자집 앞에 있는 시간대만 덜렁 나와있는 버스 시간 안내판을 보며 천조국의 시크함에 감탄한 우리는 스타벅스 1호점으로 향했다.
두근두근. 시애틀에서 제일 가보고 싶었던 곳은 바로 스벅 1호점이다.
인터넷 블로그동냥질로 얻어낸 정보에 따르면, 스벅 1호점만이 예전 스벅마크를 사용한다고 했다. 우리는 금방 옛날 마크를 찾았다! 와 여기가 스벅 1호점인가봐. 생각보다 굉장히 크네?
생각보다 더 크네....?...................
알고보니 거긴 스벅 1호점이 아니었다. 근데 왜 스벅 1호점인 것처럼 하고 있지? 쪽팔리게 난 거기서 기념사진도 찍었단 말입니다. 아무리 자기네의 영원한 꼬봉 코리아에서 온 사람이라도 그렇지 초장부터 이렇게 엿먹이면 안 되는 거 아님? 매우 당황한 나는 가짜 스벅 1호점 앞에서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던 어떤 NGO 직원에게 "대체 스벅 1호점이 어디ㅠㅠㅠ?"냐고 애처롭게 물어봤고, 자애로운 그 NGO 직원은 자신을 관광안내소 취급하는 어처구니없는 동양인에게 매우 친절하게 진짜 스벅 1호점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다시 파이크플레이스 마켓으로 들어왔다.
그 실내에 있던 이상한 가게들 말고, 이 해산물과 식료품을 파는 매장들이 뭔가 진짜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같다.
끄앙 저 게 다리 좀 보세요. 알래스카에서 잡혀온 킹크랩이라 써있는데, 저 정도면 킹킹킹크랩이다. 킹오브킹크랩.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엔 이런 그래피티와 벽보가 가득한 벽도 있다.
가짜 1호점에 속은 멍청한 우리는 결국 진짜 1호점을 찾아냈다.
그런데 줄이 정말 끝도 없이 길다. 한참을 더 가야 줄을 설 수 있었다.
쌩뚱맞은 가게들 앞에서 줄을 서있다가 우리 차례가 점점 다가와서 쇼윈도우 밖으로 1호점에서만 판다는 MD를 구경했다. 직원이 나와서 줄 서있는 사람들에게 미리 자기네가 어떤 머그와 텀블러를 팔고 있는지 보여주는 메뉴판을 돌리기도 했다. 스벅 1호점은 커피보다는 기념품장사하는 곳에 더 가까워 보였다.
어쨌거나 드디어 우리 차례다!!! 1912년에 오픈했다니, 스벅은 생각보다 매우 할아버지였구나.
진짜 스벅 1호점은 가짜 스벅 1호점과 달리 매우 좁다. 사실 앉을 수 있는 자리는 하나도 없고 테이크아웃만 가능하다.
관광객을 유혹하는 수많은 MD가 깔려있다. 나도 'THE FIRST STARBUCKS'라고 써있는 머그를 하나 샀다. 초기의 스벅 로고가 좀 맘에 안 들어서, 로고가 기념인 걸 알면서도 로고 없는 걸로 골랐다. 맘에 안 드는데 어쩔 ㅠㅠ? 내가 산, 텍스트만 있는 게 훨 예쁘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지금은 사무실 내 자리에서 나에게 끊임없이 카페인을 제공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라떼도 하나 시켰다. 너무나 예쁜 언니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 커피를 받아 든 카페인 중독자는 비로소 미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관광객으로 가득한 스타벅스 1호점을 이렇게 뒤로 하고, 우리는 그 앞으로 펼쳐져있는 바다인지 강인지를 보러 갔다.
날씨가 진짜 환상적이었다. 난 시애틀을 배경으로 한 의학드라마인 그레이아나토미를 겁나 열심히 봤는데, 그 미드를 보면 사람들이 페리를 타고 출퇴근하는 게 나온다. 아마 이 바다를 건너는 건가 보다.
시애틀, 묘한 분위기다.
이 테라스 같은 곳에는 미래를 내다보는 창문이 있었다. 내 미래...쫌...암울해보이는데요....
요 각도에서 본 게 조금 더 맘에 든다. 내 미래는 이걸로 결정했다.
미래를 심각하게 들여다보는 사촌이...
하늘이 너무나 맑고 청명했다. 우리는 스페이스 니들은 그냥 주변에서 잠깐 보기만 하고, 시애틀의 전경을 더 잘 볼 수 있다는 케리파크로 가기위해 택시를 타러 갔다.
미드를 보면 주인공들은 항상 택시만 탄다. 난 미국엔 무조건 택시가 많을 줄 알았다. 그런데 택시가 눈에 안 보인다.
더 큰 길가로 나가봤는데도 안 보인다.
조금 더 걷다보니 심지어 스페이스니들이 가까워지는데도 택시가 안 보인다.
왜...택시가 안보이는거죠...스페이스니들이 가까워지고 있다.
결국 택시를 찾지 못한 우리는 파이크플레이스마켓에서 걸어서 스페이스니들까지 갔다. 먼 거리는 아니고 한 20분 걸린다. 근데 겁나 춥다. 절대로 걷고 싶지 않았는데 걸어서 도착해버렸다. 나는 그냥 어쩔 수가 없나봐요...
어쨌든 왔으니 기념사진은 즐겁게 찍었다. 나중에 보니 웬 좀비 두마리...
스페이스니들은 관광지라 택시가 많았다. 택시를 타고 케리파크까지 갔다. 케리파크는 살짝 언덕에 있고, 대중교통도 좀 애매해서 그냥 차를 타는 게 낫다. 택시 기사에게 케리파크에서 사진만 찍고 올 테니까 10분 정도만 기다려 줄 수 있냐고 물어봤고, 흔쾌히 알았다고 했다. 케리파크에서 본 시애틀은 정말 아름다웠다. 정말 정말.
사진을 여러 번 찍었는데, 다 똑같은 구도여서 사진은 그냥 두 장만 올린다. 그래도 정말 아름답다. 노을이 질 떄라 훨씬 더 아름다웠던 것 같다.
그렇지만 사진을 찍는 것 외엔 딱히 할 게 없어서 택시기사에게 10분을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던 우리는 5분도 안돼서 택시로 돌아왔다. 택시기사는 잉??벌써?? 너네 10분 달라며??하고 의아해했고, 나는 '사진다찍어뜸^^;;;;;;;;;;;;;;;;;;;;;;;;;' 민망해하며 다시 westlake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왜 이렇게 시애틀에는 택시가 없냐고 내가 물어봤는데 이 택시기사가 나보고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불운의 아이콘은 시애틀에서도 그 명성을 이어가나봅니다..
어쨌든 웨스트레이크에 다시 도착.
밤 11시 비행기였지만 너무나 피곤했던 우리는 거의 4시간 일찍 공항에 도착했다. 레벨 7 정도의 좀비 상태로 뉴욕행 비행기를 잉여롭게 기다렸다.
심심해서 공항 기념품점을 몽땅 돌아다녀봤다. 그닥 상점이 많은 공항은 아니다. 패션 매거진을 쫙 모아놓은 이 코너가 매우 인상깊었다. 캐피탈리즘 그 자체를 보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 그리고 하나같이 모델들 넘나 미쿡스럽게 예쁘다.
스타워즈 한정판 젤리벨리 통도 봤다. 동생을 사다주고 싶었는데 부피가 너무 커서 금방 포기했다. 이 때 미국은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가 개봉한 이래 내내 뉴스에서도 매일매일 나올 정도로 전국이 들썩이고 있을 때여서 그 분위기에 맞춰 나온 한정판 같았다.
시애틀의 잠못 이루는 밤이라더니, 우리에겐 절대 그렇지 않았다. 시애틀의 매우 졸린 밤이었다. 시간이 어쩜 그리 안 가는지 그렇다고 무작정 잘 수도 업고 매우 졸리고 피곤하고 심심했다. 어찌저찌 간신히 잉여로운 시간을 보낸 후에, 우리는 드디어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뉴욕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