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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Le Message - Jacques Prévert



나는 나 홀로 떠나는 여행을 몸서리치게 싫어한다. 아무리 멋진 풍경을 봐도, 아무리 기막히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그 감흥을 나눌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혼자 하는 여행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은 먼 훗날, 낯선 곳에서의 기억을 오롯이 혼자서만 기억해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주는 쓸쓸함, 적막함 같은 감정 그 자체. 그래서 나는 혼자 떠나는 여행을 싫어한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혼자 떠나는 여행을 굉장히 좋아한다. 혼자 간 여행은 사람을 적막하고 쓸쓸하게 만들지만, 그래서 나는 비로소 나 스스로에게 솔직해진다. 여기서 '솔직하다'는 말은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만져지는 대로 느낄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자 나는 놀랍게도 반가움을 느낀다. 이 낯선 곳에서도 낯익은 일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 놀라운 '일상의 발견'때문에 나는 무미건조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만 같은 평범한 내 일상이 축복의 일종임을 느낀다. 그리고 축복과도 같은 그 평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애틋함을 느낀다. 혼자의 시간으로 꽉 찬 여행이었지만 혼자만의 여행이 아님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혼자 여행하는 느낌을 받는다. 문, 과일, 의자처럼 흔해빠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 그러나 시는 그것들을 왠지 모르게 낯설게 만들고, 다시 그 낯섦은 놓치고 있던 특별함의 가치를 끄집어낸다. 어쩌면 일상 그 자체가 우리에게 이 시의 제목처럼 '메시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이 시는 일상에서의 단어와 행동을 담담하게 사진을 찍듯 담아낸다. 열두 개의 단순한 묘사는 마치 열두 장의 사진처럼, 혹은 열두 컷의 영화 몽타주처럼 배열됐다. 이 행위를 하는 사람이 누군지 정확히 나와있지 않다. 말 그대로 이름도, 정체도 불분명한 '누군가(quelqu'un)'일 뿐이다. 이 행위들은 아무렇게나 배열된 것이 아니라, 짜임새 있는 구조에 맞춰 배열됐다. 처음 1행에서 5행은 카메라가 천천히 방안을 훑듯이 묘사한다. 그러다 6행에서 도착한 편지는 그 뒤에 이어질 7행에서 11행까지의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그리고 12행에서는 죽음에 도달한다. 시는 굉장히 제한된 단어와 제한된 표현으로만 쓰였다. 독자가 행간에서 여백을 느끼는 이유다. 시인은 하고 싶은 말들을 함축적으로 담고있는 시어를 선택한다. 시어 자체가 시인의 의미를 직접 전달하지 않지만, 독자는 마치 영화를 보며 등장인물의 감정에 빠져들듯 그 함축된 의미를 파악한다. 

시인이 전달하고자 했던 그 의미는 그러니까, '사람들 이야기'다. 누구나 겪는 이별, 죽음 같은 보편적인 이야기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렇게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보편적인 이야기는 유일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누구에게나 있는 이야기일지라도. 뒤집어보면 개개인에겐 '나만의' 특별한 사연이다. 열두 개의 나열된 행동들은 단순히 나열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인생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시에 아무런 감정묘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감을 한다. 내 이야기고, 너의 이야기며,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다. 과거를 산 사람도,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도, 미래를 사는 사람도 모두 그런 이야기 속에 있다.

***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2009년 3월 10일 밤 11시, 서울 마포 경찰서 로비의 풍경. 여자는 계속 울었다. 그렇다고 통곡 수준으로 꺼이꺼이 울지는 않았다. 여자는 소리를 작게 내면서 울었다. 소리를 일부러 작게 냈던 건지, 아니면 소리가 작게 나온 거였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소리를 내서 울다 지치면 속으로 우는지 고개를 숙인 몸이 들썩였다. 그러다가도 형사과 출입문을 틈틈이 쳐다본다. 로비를 지키는 경찰은 이 상황이 민망하지도 않는지 꿈쩍도 않고 연예인들이 깔깔대는 TV만 본다. '어떻게 해야 하지?' 무척 난감했다. 사실 내가 어떻게 할 필요는 없다. 저 여자가 누구고, 왜 우는지 알 도리가 없고 상관할 바도 아니다. 난 그냥 로비를 지키는 경찰처럼 TV나 보면서 언제쯤 형사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감 좀 잡게 들락날락하는 형사들 눈치만 살피면 되니까. 

그런데도 그 여자가 우는 모습이, 그리고 그 작게 우는 소리가 그렇게 불편하고 힘들었다. 오지랖이 발동했다. 자판기에서 커피 세 잔을 뽑아 로비를 지키는 경찰 한 잔, 그리고 울고 있는 그 여자에게 한 잔을 드렸다. 안 받을 줄 알았는데 고맙게도 그 여자는 내 커피를 받았고,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만큼은 그 여자는 울지 않았다. '역시 사람이 우는 건 보기 좋은 장면이 아니야'. 남은 한 잔의 커피는 내가 마시면서 나는 한결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익숙한 얼굴의 형사가 형사과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동료 형사랑 담배 한 대 피러 가는 모양이다. 로비를 지나다 여자를 보고 식사는 하셨냐 묻는다. 여자는 또 말없이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식사할 시간이 훨씬 지난 밤 열 한신데, 내가 듣기에 형사가 던진 질문은 참 어색했다. 두 형사가 밖으로 나간다. 친해질 기회다. 나는 쫄래쫄래 형사를 따라갔다. "오늘도 왔어요? 별 일 없는데 그냥 집에 들어가지." 처음엔 날 신경쓰는가 싶더니 둘은 담배를 뻑뻑 피우며 대화를 시작한다. 만세! 나는 관심 없는 척 경찰서를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귀를 쫑긋 새워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한다. 

나는 당시 한 달 동안 진짜 수습 기자들처럼 경찰서에서 '마와리'를 돌며 사건 기사 한 편을 쓰는 과제를 하고 있었다. 이미 다른 언론에서 보도한 사건은 안되고, 하찮은 것이라도 좋으니 보도가 되지 않은 사건을 취재하라고 했다. 기운이 넘치던 시절이라 난 진짜 기자마냥 '특종'를 잡으려고 거의 매일 밤을 마포 경찰서에서 밤을 새며 무진 애를 썼다. 교수님은 방법도 알려주지 않고 '알아서 형사과를 뚫어'서 사건을 취재하라고 했다. 첫 일주일은 형사과를 '뚫는'게 일차 목표였다. 처음엔 순진하게 형사과 데스크에 날 좀 들여보내주면 안되냐고 했다. 당연히 단칼에 거절당했다. 나는 형사들과 친해져 자연스럽게 형사과 안으로 들어가는 계획을 세웠다. 

"어우, 나이가 들었는지 이제 한강 나가는 것도 힘들어요." 한강? 귀가 번쩍 뜨인다. 뭔가 떠오르는데 나는 잠자코 있는다. 둘은 한참 동안 한강으로 나갈 때 탔던 배 얘기를 한다. "그런데 부검은 안 한대?" 역시, 내 감은 귀신같다. 누가 자살한 것 같다. 둘은 오늘 한강에 나가서 시체를 찾아온 거다. 나는 살짝 끼어들었다. "누가 죽었어요?" ".....? 네." 짧게 대답하고 다시 둘은 대화를 이어간다. "유족말로는 자살이 확실하다는데요." "이상하네, 한 달 전부터 연락이 안됐다며." "찜찜하지만 뭐 넘어가는 거죠." 또 끼어들었다. 놀란 척, 순진한 척, 눈을 땡그랗게 뜨고 물었다. 다행히(?) 그날 옷도 예쁘게 입고 있었다. "헉! 자살요?" 내 전략이 먹힌 것 같다. 형사들은 그림까지 그려가며 친절하게 사건을 설명해줬다. 내가 진짜 기자였다면 아마 이렇게까지 친절하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긴 했다.

설명을 듣자 퍼즐이 맞춰진다. 울고 있는 여자는 자살한 사람의 누나였다. 오늘 저녁에 연락을 받고 급하게 왔단다. 죽은 남자는 재정적으로 굉장히 힘든 생활을 했던 모양이다. 대학생이었는지 휴학 중이라고 했다. 한 달이 넘게 가족과 연락이 안됐던 모양이다. 형사들은 여러 정황상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유족이 자살이 확실하니 부검을 안 하겠다고 했단다. 나보고 귀찮아지니 기자들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던 청년, 가난, 휴학 중, 고로 대학생, 그리고 자살. 단번에 하찮은 사건이 아닌 것 같음을 눈치챘다.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경찰서를 돌고 온 수습기자들이 먼저 와서 죽치고 있던 내게 무슨 일 없었냐고 물었을 때 난 심한 갈등 끝에 "누가 자살을 한 것 같긴 한데...."하고 말을 흐렸다. 내가 먼저 기사를 써서 일단 제출하고 난 이후에 다른 언론사에 제보하려는 깜찍한 계획이었다. 

"등록금 없어 고민하더니 명문대 중퇴 20代 숨진 채 발견(서울신문, 2009년 3월 11일자)".
 
내 생각처럼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낳았다. 언론들은 앞다투어 이 사건을 사회면에서 크게 보도했고, 사람들은 말 그대로 '사람 잡는' 비싼 대학 등록금을 비난했다. 역시 진짜 기자들은 내가 몰랐던 것까지 취재를 해서 이 사건을 기사를 통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로 만들었다. 내 이기적인 계획은 물거품이 됐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물거품이 되는 것이 맞는' 사건이었기에 크게 섭섭하지 않았다. 내 과제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저 사건을 '제일 먼저' 알았다는 것에 큰 뿌듯함을 느꼈으니 그걸로 보상받은 셈 쳤다. 뉴스를 본 사람들은 높은 등록금에 놀랄 것이고, 그 중 행동력 있는 사람들은 등록금을 낮추기 위해 목소리를 낼 것이고, 그래서 만약에 등록금이 내려간다면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아질 것이고, 나는 그런 일을 하고 싶어서 기자가 되고 싶은 거고. 깔끔하게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딱 하나, 그날 밤새 로비 소파에 앉아 울던 그 여자를 빼면 말이다. 

세상 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그 남자의 자살을 일종의 '불행한 사회적 타살'로 받아들인다. 그 중 여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 남자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부조리한 현실에 거시적으로 대응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얼마 안가 잊혀진다. 원래 그런가 보더라. 늘 사건 사고가 일어나고, 우리네 사회엔 잘못된 제도와 이상한 관습들 투성이다. 억울하고 불행한 죽음들이 매일같이 뉴스에 등장한다. 사람들에게 누군가의 죽음은 일상이다. 그러나 울던 그 여자에게 그의 죽음은 하나밖에 없는 가족을 잃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비극이다. 어쩌면 세월이 흐른 뒤에 그 여자에겐, 그녀의 남동생이 왜 한강에 몸을 던져야 했는지는 점점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스스로 목숨을 던졌고, 그래서 더 이상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그 여자는 경찰서 로비에 앉아 하루 종일 훌쩍였지만, 신문에서 그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며 일상을 살아나간다. 당연한 건데, 이상했다. 묘하게 얽혀있지 않는 것이 없구나. 이렇게 '보편적인 이야기'와 '개인의 이야기'가 뒤섞이는구나. 그 때 처음으로 알았다. 세상 일이 그다지 깔끔하게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

나는 이 시가 그리는 풍경이 내가 그때 경찰서에서 마주했던 그 장면과 다르지 않다고, 아니 같은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특별함을 자각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일상의 소소한 사물들, 사람들의 흔하디 흔한 이야기들은 사실 그 자체가 누군가의 인생이며 누군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수 있다. 그것들은 너무나 평범해서 보통 때는 그것들의 존재조차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다 우리가 마주하는 어떤 특별한 순간들(그 순간이 희노애락 그 어디에 속하는 순간이든 간에)에 의해 평범한 일상 풍경들은 특정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내가 예전에 그랬듯 남들이 지나치는 일상의 풍경들은 어떤 일상적이지 않은 계기에 의해 나의 정서, 나의 느낌, 나의 이미지를 설명하는 특별한 기제가 된다. 이건 모두 철저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이것들을 다시 '내 이야기'가 아닌 '제 3자의 이야기'로 바라보면, 그 풍경이 누군가는 잊지 못 할 특별한 순간일지라도 다시 일상적인 풍경이 된다. 

그러니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누군가의 삶과 인생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군가의 삶은커녕 누군가의 단편적인 감정조차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간혹 이런 것을 표현하는 데 굉장히 재능이 있는 사람들(우리는 이들을 예술가라고 부른다)이 남긴 결과물(우리는 이것을 작품이라고 부른다)로 간간히 타인의 인생과 타인의 감정을 추측할 뿐이다. 각자의 정서를 표현하는 사물과 그 사물이 놓인 풍경들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러니 타인이 이를 포착할 수는 없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가 나의 정서를 이해할 것인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이 비슷하게나마 추측해줄 수는 있겠지만, 그게 전부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일상의 사물들은 남들에겐 너무나 평범한 것들이라 그것들은 절대 남들에게 내가 느끼는 것과 똑같은 감정을 불러내지 않는다. '사람들로 붐비는 서울 거리는 무엇도 변하지 않았어'. 연애사에 문제가 생겼을 때 즐겨 들은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었다. 이 가사가 내 마음에 콕콕 박혔던 가장 솔직한 이유는, 내가 힘들거나 말거나 세상이 멀쩡히 돌아가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고 어이없지만 그땐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왜 세상은 외로운 거라고, 세상 결국 혼자 사는 거라고 사람들이 말하는지 알 것 같다. 이심전심, 추억의 공유라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

그러나 시인이 그려낸 풍경은 이런 내 비관적인(?) 생각에 반문을 제시하는 것 같다. 우리가 마치 평행선을 달리듯 각자의 인생을 살아내고 있고, 그러니 서로의 인생을 완벽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정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누군가의 감정선에 닿는 것이 정말 완전히 불가능하기만 한 것일까? 

나는 나름 다양한 세상 사람들을 만났다고 자부한다. 그때마다 느낀 건 사람들 사는 모습이 사실 비슷하다는 거다. 제각각 엄청나게 다양한 경험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겠지만, 그래도 사실 그 모습이 다 비슷했다. '그래 봤자 거기서 거기'같은 힘 빠지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개개인이 느끼는 어떤 특정한 순간들을 하나의 공감대로 모으긴 결코 쉽지 않지만, 그래도 다들 '비슷한 모양'의 인생을 산다. 누군가는 의자를 보고 그 의자에 앉았던 누군가를 생각할 것이고, 누군가는 의자를 보고 그 의자에 앉아서 편지를 썼던 행위를 생각할 것이다. 평범한 어떤 물건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정서는 제각각이다. 감정의 완벽한 공감 같은 건 그래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감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다. '의자'라는 사물이 어떤 감정이나 사건을 환기시킨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공감대 형성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서로 다른 인생을 살고 다른 경험을 하기 때문에 서로가 완벽히 서로의 감정선에 닿는 다는 것은 힘든 일, 맞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모두 다 흔하디 흔한 일상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떠올린다. 우리는 그런 존재다. 타인의 감정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기에 우리는 그것을 낯설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지만, 뒤집어보면 그 낯선 감정과 정서는 어디서 본 듯이 낯익다.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다른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는 모습은 서로 닮아있다. 

시인이 포착하려고 한 건 바로 이런 맥락이 아니었을까. 나는 놓치지만 너에게는 특별한 일상, 나에겐 특별하지만 너는 놓치는 보통의 일상, 이런 것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사람 사는 세상 이야기'다. 우리는 마치 평범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건 사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인생의 특별함일 수 있다는 거다. 이 시가 쓸쓸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 구석을 찡하게 울리는 건 그래서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애틋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세상 사는 이야기 한 귀퉁이에 내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날 위로하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으면, 얼핏 보기에 무미건조하고 영양가 없어 보이는 이 일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 지 알 것만 같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옮아온다. 시에는 그 어떤 말랑말랑한 시어도 등장하지 않지만 말이다. 

시의 제목처럼, 우리의 일상은 사실 세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며, 그 메시지는 다시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고 있지 않나 싶다. 일상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매일 우리에게 '살아감'에 의미를 부여한다. 나도 살고, 너도 살고, 옆집 아저씨도 살고, 저 먼 미국 땅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사는 세상의 풍경을 담아낸다. 문득 피천득의 수필집에서 읽은 구절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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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산다. 그리고 모든 경험은 이야기로 되어 버린다. 아무리 슬픈 현실도 아픈 고생도 애 끓는 이별도 남에게는 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당사자들에게도 한낱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날의 일기도 훗날의 전기도 치열했던 전쟁도 유구한 역사도 다 이야기에 지나지 아니한다.' 
- 피천득, 『인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