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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내키는대로 떠다니는 여행기

외로워도 괜찮아, 가을날의 베를린

[내키는대로 떠다니는 여행기 3편]


이 글의 원 주소: https://brunch.co.kr/@ecrireici/3




외로워도 괜찮아, 가을날의 베를린


슬픈 현대사의 잔상과 힙스터들의 감성이 어우러진 도시가 건네는 위로






* 주의: 이 글은 기존 글보다도 특히나 더 오글거림(...).  오글거리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조용히 뒤로가기를 눌러도 전 원망하지 않아요. 그저 글쓴이의 허세가 낭낭한 걸 보니 이 사람이 또 가을을 타기 시작했구나 정도로 너그러이 봐주시면 좋겠네요.



"이 책을 HGW XX/7에게 바칩니다".


대학 시절 본 영화 '타인의 삶'의 마지막 장면에서 느낀 어떤 감동과 비슷한 감정은, 이 영화를 본 지가 꽤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불현듯 떠오르면서 사람을 괜히 뭉클하게 만들 정도로 강렬했다. 베를린이 지금 한반도처럼 동서로 두동강났던 시절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는, 동독 비밀경찰 비즐러의 감시 임무를 통해 누군가의 삶이 또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리고 서로가 '타인의 삶'으로서 어떻게 위로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니모를 찾아서'와 더불어 내 인생 영화 중에 하나다.


'타인의 삶'은 때로는 또다른 타인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영화 '타인의 삶' 스틸컷.


영화가 준 감명의 여파였는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영화를 보고 난 나는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매우 궁금해졌다. 적어도 영화에서만큼은, 불쑥 찾아오는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쓸쓸하고도 외로운 느낌, 무언가 거대한 것에 막혀서 잊기 쉬운 삶과 사람, 열정과 예술에 대한 순수한 갈망 그 자체를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마치 오롯이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토록 원했던 직업이었건만 이런저런 외상을 입고선 퇴사를 결심했던  그때의 나는, 긴 북유럽 여행 계획을 짜다 뜬금없게도 방문 도시에 베를린을 추가했다. 말이 계획이지 충동적으로(+내키는 대로) 끌리는 도시들을 여행하기로 했는데, 이상하게도 북유럽 도시들 사이에 베를린을 더하고 싶었다. 그때 나는 무언가에 강하게 영향 받고 싶고, 사실은 위로를 받고 싶었는데, 베를린을 끼워 넣은 이유에는 아마도 이 영화에서 받은 인상이 80%쯤은 차지하지 않았나 싶다.(아무도 궁금하지 않겠지만 또 주절거려보자면,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를린'은 오히려 여행 이후에나 보게 됐다. 이거 왜 썼지-_-)


나는 베를린을 가을(10월)에 방문했다. 어느 동네든 가을바람은 괜히 스산하고 사람을 쓸쓸하게 만드는데, 수많은 스토리를 품은 베를린은 그런 계절감에도 잘 어울리는 도시였다.



베를린은 사실 한 나라의 수도 치고는 의외로 인기 없는 여행지다. 여러 패키지 여행 상품만 봐도 독일 자체가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겐 그닥 끌리지 않는 국가인 것 같은데다, 독일을 가도 보통은 뮌헨을 많이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 생각엔, 베를린은 아직 뮌헨만큼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지 않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좀 과소평가받는 여행지다. 내가 보기에는 굉장히 다양한 여행 취향을 가진 여행자들을 만족시킬 몇 안 되는 도시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일단 '베를린 장벽'으로 대표되는, 현대사를 다이내믹하게 겪어낸 흔적들이 도시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는데다 수많은 박물관들이 있어서 역사 애호가들에게는 두말할 것 없이 매력적인 곳임은 확실하다.

내가 태어나던 해 갑작스레 붕괴된 베를린 장벽은, 지금은 그래피티를 즐기는 사람들의 스케치북이 된 것처럼 보였다.


옛 동독 지역에 남아있는 장벽에 그림을 그려 유명해진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는, 내 예상보다도 훨씬 더 길고 길었다. 나 같은 체력 거지들은 조심해야 한다.

이스트사이드갤러리의 이 유명한 그림 '형제의 키스' 역시 지금은 그래피티의 희생물이 되었다..... 인간적으로 저런 낙서는 좀 하지말지.
형제의 키스보다 더 감명깊었던 그림. 당시의 기쁨과 환희, 분노, 혼란, 두려움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느껴지는 묘한 그림이다.


나치 치하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그 존재 자체로도 굉장히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 사람들의 두려움과 절망을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지만,  관 형상을 하고 있는 이 제각각 크기의 조형물 미로에 갇혀 있다보면 절로 숙연해진다.


수용소에 갇혀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 그들의 음성, 거의 대부분 수용소에 갇혀서 독가스로 죽거나 처형당한 평범한 가족들의 가족사진, 이런 걸 보다 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게 된다. 인류의 평화라는 게, 말처럼 거창한 게 아니라 '소소한 일상을 그냥 살아가는 그 자체'라는 사실이 실감 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서양인들이다. 내가 방문했을 때만 그랬겠지만, 사실 나는 한국인들을 비롯해 그 많던 동양인 관광객을 이 곳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다.

이 곳의 입장료는 무료다. 굳이 이 얘기를 쓰는 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언젠가 베를린에 방문하게 된다면 꼭 이곳을 들러보길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박물관, 미술관, 기념관 등에 별 감흥을 받지 못하는 무식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그런 나에게조차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한꺼번에 던져주는 곳이었다.

굉장히 인상깊었던 문구. 역사든, 과거든, 우리가 이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실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완전히 관광지화 되어버린 곳도 있다. 찰리 체크 포인트(Charlie checkpoint)가 그렇다. 여기는 동독과 서독의 검문소가 마주하고 있는 지역인데, 여권에 당시 동독과 서독의 입국 도장을 찍어주기도 한다.


넌 지금 국경을 넘고 있다고 알려주는 그 당시의 안내판. 이런 거 보면 괜히 영화찍는 것처럼 상황극하고 싶어진다.

이 곳에서 냉전 당시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도 잠시, 독일인들이 이 냉전의 흔적을 관광상품으로 파는 모습이 사실 좀 못마땅했다. 왜냐면 저 도장을 여권에 받거나, 검문소를 지키는 당시 군인들처럼 하고 있는 직원(..)과 사진을 찍으려면 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전엔 정치 이데올로기가 팽팽하게 맞선 곳이었다면, 지금은 장사꾼 마인드가 팽팽한 지역이 바로 여기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사실 돈을 내고 사진을 찍고 여권에 도장도 받았다. 관광객의 기본 자세는 기꺼이 호갱이 되는 데 있다....^^


그렇다고 베를린이 역사적으로만 의미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이건 너무 섣부른 판단이다. 사실 현대의 베를린은, 유럽에서 가장 패셔너블하고 힙한 도시로 꼽힌다. 역사는 잘 모르겠거나 관심 없지만 패션, 아트, 클러빙에 관심이 있는 여행자들도 베를린을 좋아할 거란 얘기다.

흔한_베를린의_별다방_풍경.jpg 한명 한명이 다 괜히 뭔가 있어보이는 건 내 사대주의 때문이겠지.

'힙스터 천국 베를린'을 대표하는 곳은 미떼(Mitte) 지구다. 이 곳엔 패션 편집샵, 소규모 갤러리, 감각적인 카페와 바, 레스토랑이 늘어져 있다.


사실 여기서 본 남자고 여자고, 다들 좀 지나치게 모델 같아서 당황스러웠다. 이 동네 사람들이 유독 그랬다.

겉보기에는 평범해보이지만, 여기가 어쩌면 당신에게 베를린의 진짜 매력을 보여주는 곳일지도 모른다.
문짝 하나를 칠하는 데도 누군가의 숨길 수 없는 감각이 발산되었나보다.

뭔가 의미심장한 메시지들을 굉장히 감각적으로 표현한 건물 외벽들은 골목골목 복잡한 미떼지구의 복잡한 지역에서 마치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사실 여기는 미떼지구는 아니고, 그만큼 핫하다고 유명한 크로이츠베르그 지구다. 나는 낮에 가서 잘 몰랐지만, 여긴 밤이 더 화려한 곳이라고 한다. 아까비..

쇼핑을 즐기기에도 좋다. 유럽에서만 볼 수 있는 유명 브랜드는 물론, 소규모 편집샵들이 즐비하다. 나는 사실 여자치고는 그다지 쇼핑을 좋아하지 않지만, 여기서 팔찌 여러 개와 가방, 크롭티, 안경 닦이 등을 샀다. 다시 말하지만 난 별로 쇼핑을 그렇게까지는 좋아하지 않는데...............

(나처럼) 예쁘고 쓸데없는 것에 환장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취향저격하는 소규모 편집샵들
예정에도 없는 쇼핑을 하느라 재산을 탕진한 나같은 자는, 이런 멋진 레스토랑을 그저 지나칠 수밖에 없다.

사실 패션과 아트, 그런 거 잘 몰라도 괜찮다. 그냥 보기에 간지 나는 곳들이 많아서, 어딜 보든 눈이 즐겁다. 물론 잘 알면 더욱 즐거운 곳이기야 하겠지만, 원래 이런 건 잘 몰라도 자기 취향대로 즐기면 그만 아닌가? 미떼지구는 한마디로, 뭘 잘 몰라도 허세 떨기 딱 좋은 곳이란 얘기다. 나 같은 허세병 걸린 사람에겐, 여행지에서 허세를 떠는 건 사실 되게 중요하다.

이런 식으로.

미떼 지구의 거리 곳곳은 가을이 주는 쓸쓸한 분위기와 더해져 더욱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사실 미떼 지구가 있는 곳은 이전에는 동독 지역에 속했던 곳이라 한다. 베를린에서도 서독 지역은 자본주의진영의 혜택을 듬뿍 받으며 발전해 지금은 여느 나라의 수도같이 현대적인 분위기인 반면, 동독은 그사이 미처 그만큼 개발되지 못했기에 통일 후 유독 개성 있는 곳으로 거듭나지 않았을까 소심하게 짐작해본다.

영화 '타인의 삶'의 장면장면이 괜히 떠오르는 길거리


베를린을 여행하기로 결심했던 당시의 나는 사실 꽤나 무섭고 외로웠다. 퇴사 후에 나는 홀가분하고 자유로움을 느꼈지만 동시에 앞으로는 어째야하나 사람을 불안해지기도 했으니까. 그런 내게 베를린은 사실 깊은 위로를 줬던 도시다. 과거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과거를 과거대로 두지 않는 동시에 지금 이 순간 '베를린스러움'을 만끽하는 사람들과 도시 분위기에,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나는 어떤 숭고한 느낌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오바 죄송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드는 '자유도시' 베를린에서, 나는 이것도 하나의 과정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베를린에서 내가 내 인생의 페이지 하나를 넘기고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것이다.  베를린에서 만난 '타인의 삶'이 준 이 새로운 느낌은, 마치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이 비즐러에게 그러했듯이 나에게도 감염되듯 옮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