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0일. 스물세번째 날(2)
플뢰엔 산에서 내려온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브뤼겐. 브뤼겐은 항구 옆에 목조 건물이 늘어져있는 구역이다. 구역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는 곳으로, 베르겐의 상징같은 곳이다. 우선 브뤼겐 건너편에 있는 쇼핑센터에서 일하고계시는 L네 엄마를 만나러 갔다. 항구를 끼고 걷는데 추운 겨울바닷바람 냄새가 비리지 않고 좋았다. 상설 해산물센터(?)같은 곳도 지났는데 생각보다 비싸서 아무것도 안먹고 그냥 나왔다. L의 말로는 거기서 파는 생선이 좀 비싼 편이라고.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싸기로 손꼽히는 곳인데, 그런 노르웨이사람이 '비싸다'고 말하는 건 정말 비싼 거다.
항구 너머로 브뤼겐이 보인다.
아까 지나온 플뢰엔 산. 베르겐은 전반적으로 정갈한 느낌의 동네다.
드디어 브뤼겐이 정확하게 보인다. 브뤼겐 건너편 항구에서 찍으면 엽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구도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L의 엄마를 만난 뒤 고등어샌드위치를 먹고 우리는 브뤼겐으로 다시 건너갔다. 이렇게 항구 옆에 목조건물이 늘어진(?) 곳은 프랑스의 옹플뢰흐 항구, 덴마크 코펜하겐의 뉘하운에 이어 세번째다. 옹플뢰흐, 뉘하운과 비슷하면서도 파스텔톤 건물이 많은 뉘하운이나 건물들의 느낌이 좀더 자유분방한 옹플뢰흐에 비해 브뤼겐은 좀 더 건물이 고동색에 가까운 묵직한 느낌이다.
가게들은 전부 기념품 가게. 기념품 가게는 한두번 구경하는 재미는 있지만 소규모 개인샵을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다소 아쉬운 풍경. 유명관광지는 전세계 어디나 다 어쩔 수 없나보다...라고 말하는 나 역시 여기서 기념품을 사왔다.
기념품만 사왔으면 다행인데, 이날부터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쓸데없는 소비'가 시작됐다. 일단 이날 나는 브뤼겐에 있는 한 서점에서 십자수 도안을 사왔다. 참고로 나는 14살 때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십자수를 했다. 그 이후엔 십자수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십자수 도안을 보는 순간 십자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파는 도안은 뭔가 촌스럽고 외국 직수입 서적은 비싸기 때문에 당연히 사야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그 십자수 책은 한두번 펴본뒤 장식용으로 남아있다.
브뤼겐 곳곳을 직접 돌아다녀봤다. 정말로 옛날 그대로의 목조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노르웨이 자체가 부유한 나라지만, 베르겐은 오래전부터 노르웨이에서도 특히 부유한 도시였다고 한다. 가이드북의 설명에 따르면 베르겐에게 부를 안겨준 건 바다에서 잡히는 풍부한 대구때문이었다고. 그래서 이런 대구 조각상을 만들었나보다.
비수기인데도 관광객이 꽤 많다. 일본인 단체관광객들도 온다. 북유럽엔 전반적으로 일본인 관광객이 정말 많다. 중국인보다 일본인을 많이 본 유럽 관광지는 북유럽이 처음이었다. 비수기라 가게 문은 많이 닫혀있어서 아쉬웠다.
브뤼겐에서 빠져나와 다시 시내로 가는 길.
나무 판자 길은 걸을 때 뭔가 신이 난다.
베르겐의 메인스트리트는 브뤼겐 건너편에 있다. 노르웨이 제 2의 도시라는 수식어에 비해 번화가가 매우 작고 아담하다. 그래도 웬만한 있을 건 다 있으므로 살기에 불편함은 전혀 없어보였다.
시내 한복판엔 공연장이 있다.
베르겐은 어딜 가나 포근한 느낌이 든다.
다시 L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전날 걸어왔던 호수를 낮에 밝을 때 다시보니 색다르다. 워낙 작은 도시라 이날 하루만도 곳곳에서 L이 아는 사람들을 만났다. 도시 전체가 '한 동네'라는 느낌이다.
새가 많다. 무섭다.
오후 네시쯤 되자 해가 지려는 기미가 보인다. 코펜하겐부터 점점 북극에 가까워질수록 해가 지는 시간이 빨라졌다. 베르겐은 오후 5시면 아예 저녁이 되어버린다.
이틀째지만, L네 집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정겹다. 나도 이 동네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L의 하우스메이트 C가 저녁으로 대구를 요리해줬다. 대구를 폭신폭신하게 쪄서 감자랑 같이 줬는데 심심하게 맛있었다.
이날 C의 친구 A도 저녁을 먹으러왔는데, C가 A의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고. A는 생선 요리를 인류학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인데, FISH BOOK 이라는 학술 관련 서적(?)을 출판했다고 한다. C도 그 책의 일부를 어시스트했는데, 둘은 이날 저녁을 먹고 책을 창고에서 다른 창고로 옮기는 일을 하기 위해 베르겐 옆의 오스레(?) 오스게(?)라는 동네까지 간다고 했다.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데 나보고 같이 갈 생각이 있냐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나보고 일은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안 도울 수가 있겠어.
창고에 도착했더니 내가 생각한 그런 얇은 책이 아니라 매우 두꺼운 백과사전같은 책이 가득 쌓여있어서 당황했다. 나와 L, C, A 모두 책을 들고 실어날랐다. 나는 한번에 두 세트(?)를 날랐는데, 나를 제외한 세명은 모두 강한 체력을 지닌 바이킹의 후예여서 그런지 한번에 네세트씩 거뜬히 날랐다.
이 날 작업의 흔적. 너무나 뿌듯해서 사진을 남겼다. 달밤에 노르웨이의 낯선 동네에서 노동을 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힘들었지만 정말 독특한 경험이었다. 책은 나름 재밌어 보였다. 사진도 많고 구성도 감각적었다. A는 나보고 정말 고맙다며 나보고 한 권 가져가겠냐고 했지만, 웬만하면 가져갔을텐데 그 엄청난 책의 두께와 무게를 여행 내내 감당할 자신이 없어 거절했다.
관광에 노동까지 빡센 하루를 마치고 방에 들어오니 C가 키우는 고양이가 침대 위에서 날 기다린다. 고양이가 너무 귀여워서 피곤이 눈녹듯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느낌일 뿐이고, 당연히 나는 너무나 피곤해 완전히 뻗어버렸다. 노르웨이식의 매우 어려운 이름을 가진 이 고양이는 이날 밤 내 옆에서 갸르릉거리며 편안해했다. 따뜻하고 사람 냄새나는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매우 감사한 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