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4일. 스물일곱번째 날
전날 강풍을 헤치고 언덕 위를 오른 여파로 굉장히 늦게 일어났다. 지금 생각해보니 여행이 거의 한달째가 되어가던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여행의 피로가 몰려왔던 것도 같다. 이 날도 천천히 올레순을 산책하기로 했다. 나는 산책을 좀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 같다.
간밤에 내린 눈 덕에 전날과는 비슷한듯 또다른 분위기다.
박물관 다니는 걸 안 좋아하는 나조차도, 올레순에선 산책말고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아르누보 박물관에 가게됐다.
박물관에서 나오니 파란 하늘이! 겨울에 북유럽을 여행하는 거라 좋은 날씨는 사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운이 좋아서 가는 도시마다 맑은 날을 경험했다.
물론 맑은 날씨는 그닥 오래가지 않았다.
이번엔 항구 중간에 있는 빨간 등대쪽으로 걸어가보기로 했다. 바닷바람이 또 엄청나다. 전날 악슬라 전망대에서 느낀 죽음의 공포-_-가 다시 떠올랐다.
등대에서 보는 바다가 황량하고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워서 괜히 마음이 찡했다. 사는게 뭐라고 우리는 서로 아둥바둥 상처주면서 사는걸까....뭐 이런 할머니같은 생각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제 나를 강풍으로 공포에 몰아넣었던 전망대가 보인다. 그 위에서의 풍경은 여행이 끝난 지금도 눈에 아른거릴정도로 아름다웠지만, 다시는 올라가고 싶지 않다.
이젠 다시 (전날보다는 못하지만) 강풍을 해치고 마을로 돌아갈 시간.
이 동네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평생을 여기서 살까. 이 고요한, 바람이 거세고 귀가 얼얼할 정도로 추운 북쪽의 도시에서 말이다.
이제 이 시내의 풍경이 너무나 익숙해졌다.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근데 맞으면 굉장히 아프고 따가웠던 걸 보니 우박의 한 종류였던듯 싶다. 눈이든, 우박이든간에 아르누보풍 건물들이 눈을 맞고 있는 모습이 굉장히 몽환적이다.
숙소쪽으로 돌아가는 길. 도시 전체가 그림같아서 눈을 어디에 두어도 심심하지 않은 풍경이다.
저녁을 먹고 뭔가 아쉬워 눈여겨봤던 호스텔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2층에 올라가 라떼 한 잔을 마시며 일기를 끄적이다 숙소로 돌아갔다. 올레순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는데 뭔가 생각이 많아 잠에 쉽게 들지 못했다. 올레순은 아름다웠지만, 나한테 약간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쓸쓸함을 안겼다. 거의 새벽 5시가 다 되어서야 잠에 간신히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