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4일. 여행 열두번째날(1)
그린델발트를 떠나 루체른으로 가는 날 아침이 밝았다. 호텔 조식을 마치고, 놀라운 알프스 파노라마를 방 안에서 선사해준 알펜블릭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역으로 떠났다.
그린델발트 역에 마을버스를 타고 도착. 우리는 인터라켄까지 내려가, 인터라켄에서 루체른으로 가는 기차로 갈아타야 했다. 인터라켄~루체른 구간은 스위스 철도 구간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힌다고 해서, 기대가 가득가득하다.
하지만 그런 유명한 구간을 다니는 기차에는, 엄청난 수의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뒤, 복도에 세워둔 우리의 캐리어를 가져오려고 하는 찰나..... 체감상 거의 수백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기차에 올라탔다. 나는 엄마가 있는 칸까지 가지도 못하고 중국인들에게 말 그대로 갇혀버리는 황당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내 앞에서 저 멀리 있는 자기 일행에게 중국어로 크게 소리치는 아저씨에게 "이...익스큐즈미..."라고 해봤지만 그 아저씨는 내게 "잉????? ㅡㅡ?? (진짜로 '잉'이라고 발음함)" 이라고 되물어서 나는 짜져야했음.
하여튼 간신히 중국인 관광객 무리에서 멀리멀리 떨어진 조용한 칸을 찾은 우리는 그제서야 앉아서 쉴 수 있었다. 난 거의 전쟁이라도 겪은양 이미 녹초가 되어버렸다. 어쨌거나 그렇게 우리 눈앞에 펼쳐진 옥빛의 청량한 호수.
중국어도 안 들리고, 호수는 멋지고, 좋아 좋아.
엄마도 즐거워한다. 유리창에 비친 엄마의 얼굴도 모자이크해주는 나란 사람 참 섬세하지 않나여?
브리엔츠 역인걸 보니 이 호수는 브리엔츠 호수겠구나.
그러다 기차는 이렇게 산 위로 올라가기도 한다.
그러면 산 마을이 펼쳐짐. 나도 쓰면서 느끼지만..... 참 쓰나마나한 말을 쓰면서 가상 공간의 저장 용량을 낭비하고 있는 것 같다.
시골 간이역에 작은 벼룩시장이 열렸다. 엄마가 내려서 구경해보면 재밌겠다는, 진심이 반쯤 섞인 말을 했다.
하지만 내릴 수는 없다. 내렸다가 다시 기차를 탔는데 이번엔 그 기차가 그냥 아예 중국인 전용 기차여서 이 풍경을 조용하게 지금처럼 즐기는 게 불가능해질지도 모르니까.
어느 풍경이 등장해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런 곳에 살면 마음이 절로 선량해질 것 같다.
그 선량한 마을을 둥글게 둥글게 달리는 우리가 탄 기차.
날씨가 흐렸는데도 천국같아 보인다.
쬐깐한 마을을 지나다가, 개중에서 좀 규모가 있어보이는 마을도 지나간다.
이 곳도 천국같다.
전날 비가 많이 와서인지, 오두막이 물에 잠겨있다. 저 안에 있는 물건 어쩌지? 온 세상 걱정 끌어안고 사는 나의 오지랖이 나보다 100배는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을 게 분명한 스위스인에게까지 미치는 순간.
정말정말 그림같은 풍경이 계속해서 펼쳐진다.
그러다보면 금세 루체른 역에 도착.
루체른에 도착해 신이 난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고, 일단 숙소에 짐을 맡기러 갔다.
우리가 예약한 르 스텔(le stelle) 호텔은 구시가지 안에 있었다. 일단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가본다. 평화로운 루체른 호수를 따라 걸으니 기분이 좋다.
다리를 건너다 호수에 가득한 백조를 구경하는 엄마.
구시가지로 다 와가니, 루체른의 명물 카펠교도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얼마 헤매지 않고 곧바로 르스텔 호텔을 찾았다. 르스텔 호텔의 카운터는 여기에 없고, 옆 광장에 있는 다른 호텔에 있다. 아마 같은 주인이 운영하는 호텔이거나 뭐 그런거같다. 어쨌거나 체크인을하고 열쇠를 받은 다음, 우리의 방으로 올라가보는데...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황당한 돌발상황에 처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엘리베이터는 자동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원하는 층에 도달할 때까지 그 층 숫자를 꾹 누르고 있어야 하는 아주 신기한(=개똥같은) 시스템의 엘리베이터다. 우리는 3층인가 그랬는데, 3층까지 왔는데 문이 열리지 않아서 말 그대로 갇혀버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엘리베이터 문은 유리로 되어있는데, 같은 층에 숙박하는 어떤 아시아 남자 두명이 엘리베이터에 갇힌 우리를 발견하고 도와주려고 했지만 그들도 우리를 돕지 못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쓰다보니 또 웃기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결국 나는 국제요금비를 들여가며 호텔에 전화를 해서 우리가 엘리베이터에 갇혔다고 ㅋㅋㅋㅋ SOS를 쳤다. 호텔 직원이 와서 유리 밖으로 나보고 '달칵' 소리가 날 때까지 3 버튼을 누르라고 했다. 알고보니 한 5cm 정도 더 올라가야 '달칵' 소리가 나는 지점이었고, 달칵 소리가 나니까 문이 열렸다.
그렇게 엘리베이터에서 탈출한 우리는 숙소에 짐을 푸르고 루체른을 본격적으로 구경하러 나섰다. 엄마는 저 엘리베이터를 또 타고싶지 않아 했지만, 나는 또 타보자고 해서 내려갈 때도 또 타봄. 다행히 그 이후로는 한번도 갇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