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1일. 스물네번째 날
이날은 그리그 박물관에 가는 날. 그리그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꾸민 곳으로, 현지인들은 그리그박물관을 트롤하우겐(Troldhaugen)이라고 부른다. 트롤의 집이라는 뜻인가...?! 그리그는 노르웨이와 베르겐이 배출한 세계적인 작곡가이자, 애국자 많은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킨 이 나라 사람들의 영웅같은 존재다.
사실 L과 L의 친구들을 비롯해 내가 만난 대부분의 노르웨이 사람들은 애국심이 넘쳤다. L과 대화하다보면 가끔 지나친 애국주의적 마인드에 어쩔 땐 낯선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얘네 뿐 아니라 노르웨이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자기네 국기를 몹시 사랑하고, 노르웨이에 대한 자부심이 넘친다. 'What does the fox say'라는 중독성강한 병맛 노래로 작년 전세계를 강타한 노르웨이 그룹 Ylvis도 어느 미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인기와 돈을 얻었는데 미국에서 살 마음이 있는가'란 질문에 '우리는 노르웨이를 사랑한다. 평생 노르웨이에서 살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참고로 얘네 노래는 대부분 병맛인데, 심지어 매우 퀄리티 좋은 병맛이다. 심심하면 유투브에서 얘네 노래인 'Stonhenge'와 'Cabin'도 들어보세요. 하여튼 노르웨이엔 애국자가 많은 것 같다.
트롤하우겐은 베르겐에서 트램을 타고 조금 더 안쪽 동네로 들어가야 나온다. 베르겐 시내에서 10번 버스나 트램을 타고(트램은 어차피 라인이 하나 뿐) Hop에서 내린 뒤 10분 정도 걸으라는 설명이 나온다. 난 처음 가보는 곳이지만 현지인 L도 있고, L은 여기를 여러번 와봤다고 해서 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겁나 헤맸다. 주유소 직원한테도 물어보고 동네 사람들한테도 물어보고 다녔지만 거의 한시간 가까이 헤맸다. L은 미안해했는데, 오늘 뭐 바쁜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행하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는거지 싶어서 별로 싫지는 않았다. 계획대로 빡세게 다니는 걸 좋아한 옛날의 나의 비하면 정말 엄청난 변화다.
물론 걸어도 걸어도 계속 평범한 동네만 나오니 우리가 맞게 온 게 맞는지 끊임없는 의심이 든 건 사실이다.
그렇게 간신히 발견한 트롤하우겐! 반갑도다.
그리그가 아내와 살던 그때 그모습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그리그가 죽고 나서 아내가 집을 베르겐 시에 기증했다고 한다. 실내 사진 촬영이 안 되는 줄 모르고 찍었는데, 이걸 찍고 나서 제지당했다. 매우 민망했다. 흑흑....
작고 오밀조밀한 집이다.
집 바로 앞엔 멋진 호수가 펼쳐져있다. 사실 트롤하우겐은 그리그로도 유명하지만 이 경치로도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사람 없고 조용하며, 자연으로 둘러쌓인 북유럽의 한적한 느낌... 이런 느낌이 궁금해서 내가 여기까지 온 거였는데 뜻밖에도 그리그의 집에서 이런 풍경을 보게 되다니.
벤치에 앉아서 저 풍경을 보고 있으면 나도 페르귄트 같은 걸 작곡할 수 있을 것같은 근자감이 솟아올랐다.
호수 쪽으로 내려오면 그리그의 작업실이 있다.
그리그는 평생을 이 작업실에서 작곡활동을 했다고. 이 풍경을 보니 그리그의 음악이 왜 그리도 선율이 아름다운지 짐작이 갔다. 아름다운 음악이 나오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그런 풍경이다.
지금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트롤하우겐은 정말 트롤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 맞다고 한다. 집 주변엔 이런 트롤이 나올법한(ㅎㅎ) 숲길이 있다. 전날에 이어 또 노르웨이의 숲을 거닐게 됐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잠시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시내로 나갔다. L과 C는 물론 유치원 교사 자격증 공부를 하는 L의 동생 Z와, L과 함께 대학원에서 인류학 공부를 하는 S도 합세했다. Z는 내 남동생이랑 동갑이기도 하고 워낙 L이 얘기를 자주해서 보자마자 너무 반가웠다. 헤어질 때도 넘 귀여워서 안아줬다ㅠㅠ 나 변태같군ㅠㅠ S는 신기하게도 탈북자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었다. 탈북자들의 남한 생활이 몹시 흥미롭다며 나에게 여러가지를 물어봤다. 그리고 지금 S는 서울에서 연구여행을 하는 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인문사회계열 대학원에 진학하면 취업문이 더 좁아지고, 말 그대로 답이 없어지는데 얘네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사람들이 거리낌없이 배우고 싶은 건 배우는 정말 부러웠다. 인문사회학을 권장하는 분위기의 나라라니.... 상상도 할 수 없는 환경이다. 아무리생각해도 우리나라는 돈이 많은진 몰라도 선진국은 아직 한참 멀었다.
원래 베르겐 전통 요리를 먹고 싶었는데 어마어마한 가격(1인당 5만원은 족히 내야 식사가 가능해보였다....)에 놀란 나는 그냥 햄버거를 먹기로 했다. C가 자기가 잘 아는 수제 햄버거 가게로 데려갔다.
집에 오는 길엔 마트에 들러서 내가 눈여겨봤던 오레오 아이스케익을 사왔다. 외국마다 오레오 종류가 정말 다양하다는 건 원래 알고 있었는데, 오레오 아이스케익은 노르웨이에서 처음 봤다.
저녁엔 다같이 'Rock'n'roll highschool'이라는 80년대 미국 영화를 보며 오레오 아이스케이크를 먹었다. 정말 맛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팔면 정말 좋을텐데.....ㅠㅠ
어느덧 베르겐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L과 헤어질 시간이다. 교환학생을 다녀온 뒤 3년이 지나서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다시 만나게 된 우리는, 또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