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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2013 퇴사기념 프랑스/베를린/북유럽3국/아이슬란드

[퇴사기념 유럽여행 기록 25] 올레순(Aalesund, Ålesund)

2013년 11월 22~23일. 스물다섯~스물여섯번째 날




22일 밤 비행기로 베르겐에서 올레순으로 가는 여정. 22일엔 L의 집에서 느즈막히 일어나 고양이들과 놀면서 따뜻한 집 안에서 뒹굴거렸다. 뒹굴거림을 좋아하는 성격은 전 세계 어디를 가든 그대로구나. L이 마지막 저녁 식사로 닭고기를 구워줬는데 정말 맛있어서 싹싹 비워 먹었다. 


공항버스에서 L이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었는데 그러고 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살짝 나는 기분. 나로서는 정말 소중한 친구인데 언제 또 만날지 모르는 사람이란 생각이 역시 안 들수가 없었다. 베르겐에서 올레순까지는 비행기로 40분 정도 걸렸는데, 이때도 역시 노르웨이지안 항공(Norwegian air)을 탔다. 이 비행기는 기종이 좀 오래된건지 어쩐건지, 스톡홀름에서 베르겐 올 때와는 달리 기내 와이파이가 안 돼서 아쉬웠다. 


올레순에 내려서는 살짝 긴장이 됐다. 일단 올레순이라는 동네 자체가 워낙 생소한데다 한밤중에 도착해서 숙소를 잘 찾아갈지 자신이 없었다. 올레순 공항에 내려서 시내로 가는 공항버스 막차(...최저가 티켓의 함정은 출발 도착 시간이 지나치게 이르거나 늦다는 것. 그래도 다행히 올레순 공항버스는 마지막 비행기 운행까지 막차를 운행하는 것 같았다)를 간신히 타서 시내로 들어왔다. 


문제는 시내에서 시작됐다. 30분 넘게 달렸더니 시내같은 곳이 나오긴 했는데, 도대체 어느 정거장에서 내려야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갈팡질팡하는 사이 '왠지 이 곳에서 내려야 할 것 같은데'싶은 곳을 지나쳤고, 나는 버스기사에게 'Hi Aalesund Youth hostel'에 가려면 어디서 내려야 하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버스기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걸 진작물어봐야지 왜 지금 말하냐고, 넌 아까 거기서 내렸어야 한다는 것이다-_-... 


결국 그 다음 정거장에서 내린 나는 낯선 올레순의 밤거리에 캐리어 하나를 든 채 말 그대로 떨궈졌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귀신같은 방향감각과 촉을 발휘해 한 번도 헤매지 않고 무사히 10분만에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알고보니 올레순은 굉장히 작은, 도시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작은 사이즈의 도시였다. 베르겐도 엄청나게 작다고 생각했는데, 올레순은 베르겐의 10분의 1 사이즈 정도랄까. 하여튼 혹시 누군가 여기서 길을 나처럼 헤매게 되더라도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4인실 도미토리를 예약했는데, 한겨울에 올레순을 찾는 사람은 사실 거의 없는지라 호스텔은 거의 텅텅 비어있는 수준. 덕분에 나는 4인실을 혼자 쓰게 됐다. 12인실, 10인실도 마다않던 내게 1인실이라니....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건지 몹시 감격했다. 알고보니 4인실은 2인용 침대 하나에 1인용 침대 2개가 각각 놓여있는 매우 애매한 구조라, 혼자 쓰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처음 보는 사람과 2인용 침대에 나란히 누울 상상을 하니 생각만해도 민망했다. 올레순에서의 3박 내내 혹시나 누군가 이 방에 들어올까봐 노심초사했는데, 마지막 날까지 이 방은 나 혼자 썼다. 당연히 난 2인용 침대를 혼자 널찍이 이용했다.



밤엔 몰랐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방에서 보이는 창밖 풍경이 근사하다.



하이올레순 유스호스텔은 위치가 참 좋다. 위치가 참 좋다고 말하기엔 올레순 동네가 워낙 작아 좀 뭐하긴 한데, 그래도 곧장 내려오면 바다가 펼쳐져서 경치도 좋다(사실 올레순 어디서나 다 그렇기때문에 이것 역시 ....ㅎㅎ).



독특한 건물들이 줄을 지어있다. 올레순의 첫인상은 굉장히 독특했다. 겨울에 와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뭔가 자기만의 외로운 예술 세계를 꿋꿋하게 고집하는 느낌이다.



아르누보 건물이 줄지어있는 올레순. 올레순은 1800년대 후반(?)에 마을 전체가 화재로 다 불이나서 마을이 통째로 재건됐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당시 유행하던 아르누보 건물 양식이 대거 적용되었다고. 덕분에 올레순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아르누보 마을'로 유명해졌다.



이날 늦게 일어났기 때문에 일단 점심을 먹었다. 맥도날드에 들어갔는데, 소문대로 익히 가격이 어마어마하다. 빅맥세트를 먹으려면 우리나라 돈으로 20000원 이상 내야 했다. 내 인생 최고로 비싼 맥도날드라 기념사진을 찍어뒀다. 노르웨이의 물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다. 물가 비싸기로 유명한 스웨덴이나 덴마크의 체감 물가를 훌쩍 뛰어넘는 위대한 고물가를 자랑하는 곳이다. 내 체감 물가를 부등호로 표시해보자면.... 스웨덴<<<덴마크<<<<<<<<<<<<<<넘사벽<<<<<<<<<<<<<<<<노르웨이다.



항구를 끼고 걸어봤다. 이국적인 북유럽 도시의 풍경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베르겐보다도 훨씬 북쪽의 도시라 추위도 훨씬 심했다. 어마어마하게 추웠지만, 나는 꿋꿋하게 산책을 이어갔다.




독특한 아르누보풍 거리와 건물, 그 뒤로 아련하게 보이는 피요르드까지. '겨울왕국'에 온 기분이다.





다시 시내쪽으로 왔다. 너무 추워서 일단 어디 안에 좀 들어가서 쉬고 싶었다.



올레순에서 가장 사진찍기 좋은 스팟을 우연히 발견. 남들 다 사진 찍은 데가 바로 여기로구나.




날씨가 어째 차츰 밝아지는 느낌이다.





아무 골목이나 들어와봤다. 카페 하나쯤은 있겠지 하는 마음에 일단 걸었다.



눈덮인 피요르드의 모습이 멋지다. 올레순은 어디에 눈을 돌려도 내가 '북유럽'에 와있음을 실감케 하는 곳이었다. 





근데 어째 아무리 걸어도 카페가 나오질 않는다. 설상가상 어그부츠 밑창이 찢어졌는지 물이 새는 느낌이 들었다. 발이 몹시 시려웠다.



겨우겨우 발견한 한 카페. 그런데 분위기가 기대 이상으로 아늑하다. 핫초코의 맛은 더 좋다. 잡지를 보면서 한시간 정도 몸을 노곤노곤 녹이고 나왔다.



어느덧 어두워진 시내. 이때가 오후 세시쯤 됐을 때다. 베르겐보다도 해 지는 시간이 앞당겨졌다. 나의 여행 코스가 점점 북쪽으로 올라가는 코스여서, 여행을 거듭할 수록 해가 짧아지고 날씨는 더 추워졌다. 



노란 불빛의 아르누보 건물은 낮과는 또다른 매력이 있다.



야경을 보러 악슬라 언덕 위의 전망대로 올라갔다. 올레순의 야경이 바로 나를 이 낯선 도시까지 오게 만든 장본인이다. 난 그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올레순이라는 도시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 언덕까지 가는 길엔 케이블카 같은 건 없고, 꼬불꼬불 계단을 따라서 올라가면 된다. 


이 계단을 올라가다 난 그야말로 죽을 뻔했다. 엄청나게 추운 건 둘째치고, 바람이 미친듯이 불어서 앞으로 걸어나가기가 힘들었다. 정말 말 그대로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어야 간신히 앞으로 갈 수가 있었다. 중간에 포기하는게 안전하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바람이 거셌다. 이대로 날아가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 바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강풍'이란 말로도 모자라다. 난 진짜로 내가 날아가서 추락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몹시 쫄아있었다.



그렇게 바람과의 사투를 벌인 끝에 내 앞에 펼쳐진 올레순은 장관이다. 바로 이 장면때문에 나는 이 낯설고 먼 북쪽의 도시까지 오게 됐다.




셀카를 찍어보려고 시도했지만 모자가 뒤집어지고 날아갈 것 같고 하여튼 정말 쉽지 않았다. 일단 사진을 안 흔들리고 찍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었다. 지금 내가 여기 포스팅하는 사진은 정말 어렵게 건진 보물같은 사진들이다.



전망대에는 나를 포함해 사람이 5명'이나' 있었다. 이 강풍에, 이 추위에 여길 꾸역꾸역 올라오는 미친 사람이 네 명이나 더 있다니. 내려가는 길 역시 만만찮은 고행의 길이었음은 굳이 쓸 필요도 없겠지. 


올레순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잠시나마 추위를 잊게 할 만큼 황홀했지만 다시 올라갈 자신은 없었다. 보통같았으면 난 다음 날에도 이 곳에 또 올랐겠지만, 올레순에서는 포기했다. 그만큼 겨울 북유럽의 바람과 추위는 매서웠다.



시내로 내려오니 거리가 조명 덕에 한층 더 아름다워졌다. 스톡홀름에서 비상식량으로 사온 안성탕면을 이날 고생한 나를 위한 선물로 끓여먹었다. 베르겐에서 L덕에 떠들석하게 지내던 것과 대조되게, 홀로 보내는 올레순의 밤은 심심하고 쓸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