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5~26일. 스물여덜~아홉번째 날(1)
25일은 올레순에서 밤비행기를 타고 트롬쇠로 가는 날. 비행기 탈 때까지 하루를 온종일 올레순에서 보내야 했다. 비수기의 올레순 유스호스텔은 고맙게도 추가 요금없이 late check-out을 하게 해줬고, 여행의 피로에 시달리던 나는 거의 2시가 다 되어서야 시내로 나갔다. 이날은 시내 서점에 가서 기웃거리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어마어마하게 샀다. 이번 여행에서 산 크리스마스 카드는 다 합하면 거의 100장에 육박한다. 유럽 특유의 동화스러운 카드 느낌이 너무 좋아서 예쁜게 보이는 족족 샀더니 양이 그렇게 됐다. 내 모든 지인들에게 다 쓸 기세였나보다....
그렇게 올레순에서 하루를 꼬박 보내고 공항에 가는 길, 마지막으로 올레순 사진을 찍었다. 안녕, 올레순!
안녕, 올레순의 쓸쓸한 바다!
트롬쇠는 올레순에서도 한참 더 북쪽으로 올라가야하는 노르웨이 최북단 도시로, 북극권 안에 들어가있는 곳이다. 아문센이 북극 탐험을 할 때 베이스캠프로 삼았던 도시라고 한다. 트롬쇠에 간 이유는 오로라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와 북극권에 진입하고 싶다는 불타오르는 도전정신 때문이다. 트롬쇠에서 올레순으로 바로 가는 직항 비행기는 내가 찾기론 없었고(성수기엔 또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슬로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했다. 이번에도 역시 노르웨이지안항공을 이용했다.
지금까지 별 탈없이 노르웨이지안항공을 이용해왔는데, 결국 이번엔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최저가 함정에 역시나 또 빠져버린 내게, 오슬로에서 내게 주어진 환승 시간은 단 40분ㅋ...... 안그래도 40분만에 비행기를 갈아탈 수 있을지 나도 괜히 긴장되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노르웨이지안항공이 연착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기에 별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오슬로 공항은 굉장히 작기때문에 환승하는데 시간이 별로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얘기도 어디서 들은 기억이 있어서, 일단 오슬로에만 가서 정신만 바짝 차리면 환승을 무사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 계속 불안한 생각이 들기는 했고...... 불안한 예감은 늘 현실이 된다ㅎㅎ
올레순 공항에서 아무리 오슬로행 비행기를 기다려도 탑승 사인이 떨어지질 않았다.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 수첩에 뉘하운을 그리며 시간을 죽였지만 탑승시간이 아무리 가까워져도 아무런 안내가 없었다. 결국 오슬로행 비행기는 30분이나 연착되고 말았다. 산술적으로 따지면, 내가 오슬로 공항에서 10분만에 비행기를 갈아타야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승무원에게 트롬쇠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연착이 돼서 주어진 시간이 10분밖에 없다, 갈아타는 게 가능하겠냐고 물었다. 승무원은 딱한 표정을 지으며 너가 탈 트롬쇠행 비행기가 오늘 오슬로에서 트롬쇠로 가는 마지막 비행기이니, 혹시 비행기를 놓치게 되면 우리가 다음날 아침 첫비행기로 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래도 일단 뛰어보라며 나를 비행기 맨 앞자리로 데려왔다. 베를린에서 일정을 착각해 하루 먼저 떠나고, 스톡홀름에서 지갑을 잃어버려도 침착함을 유지했던 나도 여기선 흔들리기 시작했다. '10분만에 내가 비행기를 갈아탈 수 있을까? 만약 놓치면 오늘 오슬로에선 어디서 자야하지? 이번 여행 숙소 중 호스텔을 못 찾은 트롬쇠 호텔비가 제일 비쌌는데 이거 하룻밤치를 날리는건가? 수하물 칸에 실린 내 짐은 어떻게 되는거지?!?!' 온갖 걱정이 내 머릿속에 떠다녔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착한 승무원은 비행기가 도착하자 내게 'I hope you manage it'이라 말한 뒤 내 앞에서 비행기 문을 활짝 열어재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대한의 속력을 내서 오슬로 공항을 질주했다.
도대체 누가 오슬로 공항이 작다고 했단 말이지??????? 10분만에 비행기를 갈아타야하는 자에게 오슬로 공항은 지나치게 광대했다. 고작 국내선 비행기를 환승할 뿐인데 게이트가 서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있었다. 피를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건 내 여행 최고의 고난이도 퀘스트였다.
행운은 나의 편이었는지 어쨌는지 나는 운좋게 비행기를 놓치지 않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거짓말안하고 비행기는 바로 움직였다. 내가 들어오는 걸 보고 내 옆에 앉은 트롬쇠에 산다는 노르웨이인 할머니가 등을 토닥여주며 잘 왔다고 했다. 알고보니 공항과 비행기 안에서는 나를 찾는 방송을 했던 모양이다. 나란 여자, 오슬로 공항에서 이름 방송되는 여자다...^_ㅠ 격한 달리기 탓에 온 몸이 쑤셨고, 채 회복되기도 전에 비행기는 트롬쇠에 도착했다.
내 눈앞에 펼쳐진 트롬쇠 공항은 그야말로 '눈 세상'이었다. 눈이 펑펑펑펑 내리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본 곳 중 가장 지구 북쪽, 그야말로 내인생 최북단에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공항 버스를 타고 시내로 빠져나간 뒤, 다시 거기서 마을 버스를 갈아타고 이 눈을 해쳐 숙소를 찾아갈 자신이 없어 그냥 공항에서 택시를 탔다. 그 밤중에 마을버스가 운행하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어쨌거나 살인물가의 나라에서 택시를 타다니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만큼 그날 좀 지쳐있었다.
나는 Home Sleep 이라는 이름도 아늑한 호텔에서 묵었다. 말이 호텔이지 가정집을 숙박업소로 꾸민 곳이다. 그래서 호텔과는 달리 부엌에서 요리도 가능하다. 이 호텔은 시내에서 버스로 20분 정도 떨어진 한적한 마을에 있는데, 주인 아저씨와 아줌마가 거의 천사 수준으로 친절하고 다정하다. 이름만큼이나 방도 아늑하다. 여행 내내 호스텔을 고집했지만 트롬쇠에선 호스텔 찾기가 쉽지 않아 그냥 가장 저렴한 호텔을 골랐는데(3박에 우리나라돈으로 27만원 정도했으니 호텔 중에서 저렴했을 뿐, 결코 저렴하진 않다), 결과적으로는 대만족이었다. 호텔 바로 코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기때문에 버스타는 것도 편하다. 여행 내내 가장 안락하게 지냈던 호텔이었던 Home Sleep, 혹시 누군가 트롬쇠에 가게된다면 여기를 강력추천한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숙소를 나서니, 마을 곳곳이 어마어마한 눈으로 뒤덮여있다.
참고로 이 때가 오전 11시쯤 됐을 때다. 겨울의 트롬쇠는 11시쯤 해가 떠서 오후 1시면 해가 져버리고, 2시면 완전한 저녁이 되어버린다. 해가 뜬 것도 화창하게 햇님이 딱 보이는 게 아니라 그냥 날이 좀 밝은 느낌이 드는 정도다. 극단적으로 해가 짧은 것을 보며 나는 내가 북극권에 와있음을 실감하 수 있었다.
버스를 타려다 눈덮인 마을 풍경이 평화롭고 포근해 좀 걸어보기로 했다.
길을 알고 걸은 건 절대 아니고, 그냥 걷다보면 시내로 가는 버스정류장 하나쯤은 나오겠지 싶은 마음에 일단 걷고싶을 때까지 걷기로 했다. 눈이 엄청나게 쌓여있는 이 곳의 풍경은 지금까지 내가 본 북유럽의 모습 중 가장 북유럽다웠다.
걷다보니 바다가 나온다. 내 인생 처음으로 만나는 '북극의 바다'다.
버스정류장을 발견해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탔다. 베르겐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곳도 미친 물가의 나라 노르웨이라고, 시내버스 주제에 한 번 타면 거의 만 원 가까운 돈을 내야 한다.
시내로 들어올 때는 거의 1시가 다 되었을 무렵. 날이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이제 막 점심 시간이 끝날 시간인데 저녁 느낌이 나다니, 비현실적인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매우 신이 나기 시작했다. 내 눈에 보이는 동화같은 거리풍경이 그런 느낌을 더했다..
이 이후에 간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를 포함해, 나는 내가 본 모든 크리스마스 장식 중 가장 장식과 도시가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도시는 트롬쇠라고 단언할 수 있다.
시내를 넋을 잃고 바라보다 북극박물관(Polarmuseet)에 갔다. 북극이란 단어는 나를 참 호기심 넘치게 만들었다. 북극 박물관은 항구 옆에 있다.
어처구니없게도 저 문을 못 열어서 낑낑거리다 다른 관광객의 도움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허당의 기질은 북극에서도 죽지 않는다.
이 곳에선 북극권 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풍습, 북극 탐험의 역사와 동식물들을 소개한다. 코카콜라 CF에 나오는 귀여운 북극곰은 알고보니 정말 위험한 동물이었다.
이 곳을 기점으로 삼아 인류 최초로 북극점을 탐험한 아문센의 동상. 아문센에 대한 트롬쇠 사람들의 자부심은 엄청나다.
실제로 탐험가들과 관련이 있는 어떤 장소에 오면, 그들의 마음이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포르투갈의 호카 곶에서 그랬듯, 북극의 바다가 눈앞에서 넘실거리는 트롬쇠에서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