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일. 여행 열번째날(1)
전날 프랑스 아비뇽에서 스위스 그린델발트까지, 폭우를 뚫고 기차 여정이 이어졌다. 아비뇽에서 그린델발트까지 가려면, 아비뇽 > 제네바 > 베른 > 인터라켄을 거쳐야 한다. 기차를 여러번 갈아타야해서 굉장히 긴장을 많이 했는데, 사실 기차는 무사히 갈아탔다. 사진은 제네바 중앙역에서 베른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릴 때 찍었다. 이곳 사람들은 5월인데도 두꺼운 옷을 입고 있다.
사실 기차를 갈아타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는데, 문제는 그린델발트에 내려서였다.
예상치 못한 폭우가 쏟아지는데, 구글로 검색한 그린델발트 콜택시 회사는 도통 전화를 받질 않고, 숙소는 그린델발트 역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 대중교통은 없고, 히치하이킹할만한 차도 안 다니고, 설상가상 가로등도 없어서 길도 모르겠고, 엄마는 지쳤고, 캐리어는 남프랑스에서 사재기한 온갖 예쁘고 쓸데없는 것들때문에 겁나 무겁고......이 언덕인 것 같아서 낑낑대면서 캐리어를 끌고갔더니 호텔은 커녕 그냥 가정집이 나와서 진짜로 눈물이 나올 뻔했다(사실 쪼금 울었음. 무슨 실연당한 발라드 노래의 가사처럼 빗물에 내 눈물을 쪽팔려서 숨겨봤다 ㅋ..ㅋ..ㅋ..) 도대체 알펜블릭 호텔은 어디있나요!!!!!! 내 모험은 여기서조차 계속되는구나 한탄하며 호텔에 전화를 걸었지만, 걔네가 나보고 어디있냐고 했는데 내가 어디에 있는지 설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서 또다시 절망.
어쨌거나 빗속에서 한시간가량 공포에 떨다가 겨우겨우 숙소로 도착했다. 숙소로 도착하자 콜택시회사에서 콜백이와서 나의 분노가 한층 더 심해졌지만, 어쨌든 무사히 도착해서 안도감에 엄마는 기절한듯 잠이 들었고 나는 컵라면 하나를 해치운 뒤 나 역시 곯아떨어졌다. 나중에 알고보니, 굉장히 쉬운 길인데 내가 밤에 겁나 헤맨 거였다. 그냥 쭉 직진만 하면 되는 것을 웬 언덕에 올라가서 고생고생 생고생을.
아침에 눈을 떴는데, 창문 너머로 뭔가 커다란 게 보였다. 비몽사몽인 상태로 또 겁을 먹고 저게 뭐지, 하고 창문으로 다가가봤다.
창문 너머로 보인 정체불명의 커다란 것(?)은 바로 이 알프스 산의 봉우리. 잠이 덜 깬 상태에서 거대한 봉우리를 보니 당황스러웠다. 어버버하면서 엄마를 급하게 깨웠다.
허걱. 우리가 알프스에 와있구나.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갔다. 창문 밖으로 알프스가 펼쳐진다. 환상적인 아침식사였다.
전날 폭우가 쏟아진 게 무색하도록 날씨가 눈부셨다. 테라스에서 아침을 먹고 싶었는데, 아직 테이블과 의자가 채 마르지 않아서 그냥 안에서 먹어야했다.
엄마가 외출 준비를 마칠 동안, 나는 역 근처 마트로 가서 점심거리를 사오기로했다. 숙소에서 역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린다.
알펜블릭 호스텔(Alpenblick Hostel, Hotel) 근처는 이렇게 생겼다. 사실 내가 알펜블릭 호스텔을 조금 먼데도 불구하고 숙소로 잡은 이유는,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앨*스할머니 민박이나 에어비앤비의 인기있는 샬레는 이미 예약이 꽉 찼고, 역 근처 호텔은 너무 관광지스러워서 자연의 느낌이 덜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곳은 호텔(인데 이름은 호스텔로 되어있다. 호스텔같은 다인실도 운영하는듯?)인데도 역에서 멀리 떨어져있어서 자연과 가까울 것 같았고, 대형 호텔보다는 샬레 느낌이 더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이런 선택은 전날 공포를 체험하게 했지^^^^^^....
호텔 자체는 깨끗하고 좋았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공용인데 워낙 깨끗해서 별 불편은 없었다. 호텔 숙박증을 보여주면 마을버스가 역에서 알펜블릭 호텔까지는 무료로 태워주는데, 막차 시간이 오후 5시ㅋ_ㅋ.....
어쨌거나 우리 방에서 엄마가 나한테 안녕~ 잘다녀와~ 라고 인사한다. 저기서 엄마의 배웅을 받으니, 진짜 하이디가 된 기분이다. 공기는 청량하고 날씨는 눈부시고 기분은 말할 수 없이 가볍다.
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평화로운 스위스 시골 그 자체다.
역 근처에 시계가게 주인이 전날 내가 폭우속에서 헤매기 전, 나보고 교회 하나를 지나가게 될 거라고 했는데 그 교회가 이 교회구나. 알프스 봉우리와 어우러진 교회 첨탑이, 전날과 달리 몹시 아름답게 보인다.
이제 시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 언덕이 전날 내가 폭우속에서 엄마를 패닉에 빠트린 그 언덕. 나는 길치라는 이유로 불효녀가 되었다. 흑흑.
눈을 어디에다 돌려도 풍경이 환상적이다. 빨리 샌드위치를 대충 사고 엄마에게 돌아가 산책을 하러 나가자고 하고 싶어서 심장이 뛰었다.
쿱과 미그로 등 슈퍼마켓이 있는 시내에 도착. 시내 근처는 거의 대부분 다 호텔과 기념품점이다.
가로등 하나 없는 거리에서 폭우를 맞으며 헤맬 때는 섬뜩하기했던 이 곳이, 알고보니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다.
샌드위치를 사온 뒤 나는 엄마와 함께 부리나케 하이킹을 빙자한 산책을 하러 나갔다. 사실 하이킹 코스가 5월에는 문을 닫은 곳도 많고, 가다가 길을 잃어서(길치의 숙명이다) 그냥 동네를 산책하게 되었다.
햇살이 내려쬐는 이 곳은 천국인가요.
자동차가 지나간다. 어제 저 사람들을 만났더라면 좀 태워달라고 굽신굽신 할 수 있었을텐데.
내가 전날을 한탄하는 동안, 엄마는 풍경에 빠져들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여기 정말 말도 안되는 풍경이라는 말뿐.
왜 나는 여기서 태어나지 못한 거지? 너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갑자기 내가 사는 동네 풍경이 떠올라서 꼬인 생각이 떠오른다.
길을 걷다가 우리는, 한 노부부가 테라스에 나와서 선베드에 누워 각자 독서하는 광경을 보고선 말문을 잃었다. 너무 부러워...........................
저 점점이 박힌 노란색은 사실 다 꽃이다.
이렇게 예쁜 꽃들이, 피어있다는 표현으로는 모자르고...음.... 흩뿌려져있다.
눈을 어디에 두어도 풍경이 다 멋지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하이킹 코스를 놓치고 결국 마을 어딘가로 들어선 우리. 하이킹 코스 아니면 어때~ 사실 여기는 어딜 걸어도 멋져서 그런 거에 구애받지 않고 걸어도 즐겁다.
사실 어제 밤에 엄마는 왜 이런 숙소를 잡았냐고 나를 엄청나게 원망했는데, 산책을 누구보다 집중해서 하고 있는 엄마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적당한 풀밭을 찾아 앉아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웠다. 그 전에 그림같은 구도로 엄마 사진도 찍어줬다. 엄마와 여행을 다니려면 가이드, 통역, 찍사, 말동무, 짐꾼 등의 멀티플레이를 군말없이 해내야 한다.
샌드위치와 과일쥬스, 초콜렛을 먹고 우리는 마저 걷기 시작했다.
전날 우리가 이런 언덕에서 헤맸단 말이지? 엄마가 기막혀했다. 길 못 찾는 불효녀는 걍 짜져서 사진이나 찍어야겠지요.
스위스 사람들은 집도 예쁘게 꾸민다.
안 그래도 예쁜 풍경에 예쁜 집인데, 이런 예쁜 색색의 꽃을 길러서 굳이굳이 예쁨을 극대화시킨다. 이런거 보면 난 너무 예뻐서 어처구니가 없어지고, 급기야 화가 난다. 나도 이렇게 예쁘게 살고 싶어.
이제 이런 노란 꽃은 너무 흔하져서 더이상 신기하지도 않아.
날씨가 어두워지고 있다. 우리는 산책을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가서 오늘 융프라우에 올라가도 시간이나 날씨가 괜찮을지 물어본 뒤에, 괜찮다면 융프라우에 올라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