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28일. 첫번째 날
스물 다섯의 나이에 내가 그토록 선망하던 직업을 그만둘 줄은 나도 몰랐다. 몸과 마음이 말그대로 '너덜너덜'해진 상태에서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가득할 때, 오랜 고민 끝에 사표를 던졌다. 마지막 야근을 서며 정확히 열흘 후에 파리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끊었다. 운이 좋아 90만원 후반대의 표를 찾아냈다.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 이후 2년만에 타는 러시아 항공이었다.
드골공항에서 몽파르나스역까지 가는 에어프랑스 리무진을 탔다. 교환학생시절부터 내게 끊임없이 시련을 안긴 프랑스는 역시나 이번에도 도착하자마자 내게 리무진 티켓 자판기에서 카드가 안먹히는 당황스러움을 선사했다. 옆에서 기다리던 어떤 친절한 여자가 내게 버스기사가 현금으로도 요금을 받으니 굳이 표를 미리 안 사도 된다고 했다. 다행이었지만 기사가 나에게 25세 이상의 성인 요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살짝 짜증이 났다-_-
나는 파리에서는 도착한 날 1박을 한 뒤 그 다음날 밤에 곧바로 헨느로 떠날 작정이었기 때문에 몽파르나스 역 근처에 호스텔을 잡았다. 27일 밤에 도착했는데 그날 무섭게 바람이 불었다. 몽파르나스 역에서 숙소까지는 걸어가긴 살짝 애매하게 먼 거리여서 택시를 잡으려고 했는데, 궂은 날시 탓인지 택시가 심각하게 안잡혔다. 내가 아무리 겁이 없고 프랑스 거주 경험이 있다한들, 밤 11시에 거센 바람을 맞으며 파리의 큰 역 앞에 홀로 서있는 건 무서운 일이다. 어떤 아저씨가 먼저 잡은 택시를 내게 양보해줘서 20분 정도 후에 다행히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4인실 호스텔에 들어가니 이미 애들이 불을 다 끄고 자고 있고...얘들아 어째서 이렇게 일찍 자니 ㅠㅠ... 사람들을 깨우고 싶지 않았던 나는 간신히 옷만 갈아입고 세수를 한 후에 바로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숙소 창문에서 어렴풋이 에펠탑이 보였다.
근처 마트에 들러 간단히 아침거리를 사고 파리에서 유학중인 J언니를 만나러 갔다. J언니는 파리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파리에서, 영화를, 공부하다니. 사회 생활에 찌든 내 눈엔 그저 다 멋있어 보일 뿐이다. 언니를 오페라 앞에서 만나기로해서 지하철을 타고 오페라 역으로 갔다. 딱히 털릴 건 없지만 그래도 소매치기가 많은 곳이라서 긴장했다.
3년만에 보는 오페라. 오랜만이야.
오페라 역 출구에 찰싹 붙어있다가 언니에게서 조금 늦을 것같단 연락을 받고 파노라마 사진을 찍었다. 오랜만의 파리라서 약간 감동한 상태.
J언니는 사실 2010년 크리스마스 때 보고 3년만에 처음보는데, 언니나 나나 그때와 달라진 게 없어서 어색함없이 금방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언니는 오페라 근처에 일본 우동을 맛있게 하는 유명한 집이 있다고 날 데려갔다. SANUKIYA 라는 곳인데 사람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 걸 보니 소문난 집이었던 것 같다.
나는 니꾸우동을 시켰다. 니꾸는..소고기였던가...가물가물.
우동을 먹고 루브르 옆 스타벅스에서 라떼를 먹고 밀린 폭풍 수다를 나누었다. 언니가 했던 얘기 중에 한국인의 파리 관광에 대해 기억에 남는 게 있다. 파리에서 오랜 유학생활을 한 이 언니는 자기는 파리가 참 좋다고, 파리에는 즐길 가치가 정말 많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보면 오직 소비가치만 누리고 가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고. 쇼핑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일부 한국 사람들이 유럽에만 나오면 명품 쇼핑에만 열을 올리는 모습이 썩 좋아보이지 않았던 나는 사실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다를 나눈 끝에 우리는 튈르리 공원을 산책했다. 햇살의 색감이 너무 아름다웠다. 나는 거의 그 해에 처음 느껴보는 여유로운 공기를 마셨다. 파리가 이토록 아름다운 곳인지, 왜 3년 전에는 몰랐을까.
루브르 근처엔 여전히 사람들이 많다.
그때 튈르리공원에서는 이런 조형물로 전시도 하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서 여유를 만끽하던 순간. 사표를 쓴 지 거의 2주만에 처음으로 내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콩코드 광장을 지나 세느강을 건넜다. 오늘의 파리를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고 무슨 청승맞은 쌍팔년도 드라마의 여주인공처럼 말했던 기억이 난다.
생제르맹데프레까지 걸어가서 아모리노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J언니 덕분에 파리를 처음 여행한 것처럼 두근거리면서 돌아다녔다. 저녁 8시쯤, 언니랑 헤어지고난 뒤 몽파르나스 역 무인락커에 맡겨둔 짐을 찾아서 헨느(Rennes)로 가는 TGV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