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30일~31일(1). 여행 두 번째~세번째날(1)
시애틀 시간으로 밤 11시에 뉴욕행 국내선 비행기를 탔다. 미국 서부 끝에서 동부 끝으로 날아가는 거라 한 나라에서 움직이는 건데도 비행시간이 6시간 가까이 됐다. 미국이란 정말 크고도 크구나.
장거리 비행은 언제나처럼 나를 완벽한 레벨10의 좀비로 완성시켰다. 뉴욕JFK공항에 상거지꼴로 내린 나와 사촌이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데다가 불과 12시간 전까지 시애틀을 돌아다니느라 체력이 완전히 방전된 상태였다. 거기에 시차까지 덮쳐 우리는 매우 졸리고 어지러웠다. 지하철로 숙소까지 가려던 계획을 깨끗히 포기하고 택시를 탔다. 공항 안내데스크에서 예약 택시를 소개해줬는데 전화로 예약받은 사람이 나보고 뜬금없이 국적을 물어보길래 한국이라했더니, 말이 통할거라 생각했는지 중국인 기사 아저씨를 보내줬다. 흠... 전 중국어는 니하오 쎼쎼밖에 모릅니다만... 아무리 중국인이 제주도를 사들인다한들 아직은 한국은 한국인데요ㅠ? 어쨌든 택시는 편안했고 생각보다 저렴했다. JFK에서 예약한 호텔이 위치한 롱아일랜드시티까지 팁포함 45불을 받았다. 우리는 롱아일랜드시티 홀리데이인호텔에서 2박을 하고나서 맨하탄에 있는 한인민박으로 옮길 예정이었다.
거의 24시간만에 침대라는 사물을 보니 감격스러웠다. 당장 씻고 자야지.
사촌이가 먼저 씻는동안 나는 뿌연 뉴욕을 창 너머로나마 쳐다봤다. 저 아련하게 보이는 건물들이 있는 곳이 아마 맨하탄이겠지. 뉴욝 뇱 안뇽.
그리고 거의 12시간을 잠들었다. 나는 원래 방광이 ㅈㄹ맞아서 자다가도 중간에 깨서 화장실에 기본 두번은 가야 하는 사람인데, 화장실도 한 번도 안 가고 시체처럼 잤다. 사촌이는 나보다 더 했다. 나는 배가 고파서 저녁 8시쯤 깼는데, 사촌이는 내가 일어나서 부스럭부스럭 돌아다니는데도 전혀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잠을 이어갔다. 사실 중간에 좀 겁도 났다. 애가 죽은 줄 알고..
어쨌거나 혼자 깬 나는 배가 고파서 호텔 주변에 슈퍼나 편의점이 있겠거니 하고 겁도 없이 롱아일랜드시티 한복판을 밤에 나가버린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이 동네는 이주민이 좀 많이 사는 동네여서 치안이 썩 좋은 곳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때의 나에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난 배가 고팠다.
호텔을 기준으로 세 블럭 정도를 빙 돌아다녔는데 아무런 가게가 없었다. 사람도 없었다. 그때부터 배고픔보다 무서움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돌아다니다 어떤 애가 날 보고 웬 좀비야 하면서 총을 쏴서 내가 맞아죽으면 사촌이는 내가 죽은 걸 알까? 여러 생각이 들어서 무서웠고 나는 뛰어서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프런트에 혹시 근처에 슈퍼 없냐고 물어보니 바로 맞은편에 있다는 허무한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길을 나선 반대 방향에 있는, 나오면서 얼핏봤지만 간판이 전혀 슈퍼스럽지 않아서 무시하고 지나간 바로 그 가게였다. 이렇게 나는 내 인생 삽질 리스트에 또 하나의 항목을 추가시킨다^^
난 원래 마트 구경 슈퍼 구경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인데 이 슈퍼는 약간 냄새가 꼬리했다. 베이글 코너가 있긴 했는데 위생과는 전혀 상관없이 꾸려온 것 같아서 먹을 생각도 안했다. 이 곳의 손길이 그나마 덜 닿아있을 것 같은 과자랑 음료수만 좀 골랐다. 근데 천조국은 캔맥주 크기도 크다. 우리나라에서 파는 그 길쭉한 캔맥주의 1.5배 사이즈다.
먹을 것이 생긴 나는 금세 행복해졌다. 호텔 방으로 돌아와 죽음과 잠의 경계쯤에 있어보이는 사촌이 옆에서 랜치맛 프링글스를 까먹었다. 한국에선 못 본 맛이라 골라봤는데 시즈닝이 약간 따끔하게(?) 시큼짭잘한 맛이었다. 뭐 나쁘지 않았다....고 말하기엔 너무 금세 흡입해버림.
드디어 잠에서 깨어난 사촌이가 꼼지락거리며 몇 시인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오늘 하루는 잠으로 날린 하루니 나는 그냥 더 자라고 했지만 사촌이가 깨어났으니 티비를 맘껏 봐도 되겠지? 티비를 켜서 채널을 몇 개 돌려보는데 프렌즈가 나오고 있었다!!!!!!!!!!!! 뉴욕에서 프렌즈라니!!!!!!!!!!!!!! 우와 나 너무 뉴욕에 온 보람이 있쨔나!!!!!!!!!!!!!!!!!!!!!!! 우리의 뉴요커 친구인 척 하지만 사실은 모든 에피를 캘리포니아에서 찍었다던 챈들러, 모니카, 피비, 조이를 뉴욕에서 보니 가슴이 설렜다.
우리는 곧바로 바로 잠들었다. 숙면을 취하러 굳이 뉴욕까지 왔나 봅니다.... 잠깐 과자를 먹으며 티비를 보느라 깨어있던 약 2시간을 제외하고 뉴욕에서의 첫날은 완전히 수면상태였다. 2015년의 마지막 날, 뉴욕에서는 두번째 날, 그러나 사실상 첫 번째 날 아침 우리는 드디어 밖으로 나갔다. 첫 번째 목적지는 뉴욕 베이글 3대 맛집 중 하나라는 Murray's Bagle 이다. 퀸즈 지역에 있는 롱아일랜드시티를 벗어나 맨하탄으로 들어오니 비로소 뉴욕에 온 실감이 난다.
구글맵은 약간 못미더웠으나 어찌저찌 오래 헤매지 않고 금방 머레이 베이글을 찾았다. 저 큼지막한 현수막의 위용만 보면, 베이글집이 아니라 무슨 박물관쯤 될 것만 같다.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베이글과 크림 소스가 있었다. 냄새가 일단 너무나 고소해서 합격드립니다.
우리는 플레인베이글에 크림치즈, 연어를 추가해서 라떼와 오렌지주스와 함께 먹었다. 맛은 감동적이었다. 저 가득한 크림치즈를 좀 보세요. 연어도 하나도 안 짜고 폭신했다. 하루를 꼬박 잔 우리는 거의 24시간만에 밥다운 밥을 먹으며 감격했다. 커피도 맛있다. 사실 분위기도 굉장히 좋아서 만약에 내가 뉴욝커였다면 여기를 자주 왔을 것 같다.
베이글로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진 우리는 유니언스퀘어로 갔다. 플랫아이언빌딩을 보고, 홀푸드마켓이라고 유명한 식료품점에도 들렀다가 점심으로 쌀국수를 먹기 위해서다. 맞아요. 우리는 방금 베이글을 먹었습니다.
유니언스퀘어다. 뭔가 미드에서 본 것만 같아. 착각이겠지.
유니언스퀘어는 광장인데, 뉴욕 사람들이 그냥 흔하게 많이 만나는 약속장소 중에 하나라고 한다. 실제로도 그런진 모르겠다. 가이드북이 그랬어용.
일단 좀 출출한 것 같으니 홀푸드마켓도 눈에 띄고해서 홀푸드마켓에 먼저 가기로 한다. (응?)
과일 색깔은 언제 봐도 눈이 즐겁다. 디스플레이도 귀여워.
커피콩도 판다. 카페인 중독자는 카페인으로 인한 수전증으로 손을 덜덜 떨면서 자동으로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과일과 쿠키를 사서 유니언스퀘어 벤치에 앉아서 까먹었다. 과일은 맛있었는데 쿠키는 좀 실패했다.
그러다 우리는 우리 주변과 공원을 맹렬하게 돌아다니는 청설모를 발견한다! 제발 우리 근처로 와주기를, 그래서 우리가 청설모에게 과일을 주는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건만 우리 아주 가까이까진 오지 않았다. 청설모에게 우리는 매력이 없나보다...
배가 어느정도 채워졌으니 이제 플랫아이언빌딩을 보러 가보기로 한다. 가는 길 이름이 브로드웨이라 잠시 헷갈렸는데, 알고보니 맨하탄은 가로 세로 길이 쭉 이어지는 바둑판식 모양의 도시라 아마 이 브로드웨이를 따라 쭉 올라가면 내가 아는 그 브로드웨이가 나오는 거 같았다.
짜잔! 이 특이한 모양의 플랫아이언빌딩에 도착했다. 이 빌딩의 존재에 대해 알게된 건 how i met your mother에서 건축가인 테드가 뉴욕의 여러 랜드마크 빌딩을 소개?하는 에피를 보면서였다. 내가 미국에 대해 알고있는 거의 모든 잡상식의 출처는 결국 아메리칸 티비 시리즈다.
플랫아이언빌딩은 이 다리미 모양으로 유명한데 실제로 보니 건축물에 별 감흥 없어하는 나(=바르셀로나에서 남들 다 가우디에 감명받을 때 과일쥬스에만 오로지 열광했던 건축 무지자)에게도 신기했다. 그러니 세로로도 찍어봐야 한다. 하지만 빌딩 끝부분이 짤렸다.
다시 유니언스퀘어로 돌아가 사이공마켓이라는 베트남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방금까지 뭘 먹지 않았냐고 물어보실거면 조용히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TIGER 매장이 보이길래 들어가봤다. 새해를 앞두고 이런저런 파티용품을 앞에 두고 팔고 있길래 저런 모자를 써봤는데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사촌이와 함께 시시덕거리며 셀카를 찍고 이따 밤에 카운트다운 하러 나갈 때 꼭 예쁜 장식을 머리에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토록 철없는 언니여서 미안해 사촌아..
유니언스퀘어로 돌아가보니 아까는 안 보였던 거리의 화가들이 보인다. 뇱은 역시 예술의 도시인가봐요.
유니언스퀘어에서 좀 더 내려가면 뉴욕대가 나온다. 이 근처 마을이 사실 유명인들이 꽤 많이 사는 곳이라고 하는데 어딘지 잘 모르겠다(...). 괜히 가는 길이 뉴욕스러워서 여행 온 기분이 한껏 더 살아났다.
사이공마켓 도착! 베트남 음식점인데 쌀국수와 폭찹이 한국인 입맛에 매우 잘 맞는다고 인터넷에서 주워들었다. 아무리 어제 하루를 꼬박 잤다한들, 몸이 지쳐있는 상태기 때문에 국물이 있는 음식이 좋을 것 같았다. 누가 보면 무슨 엄청난 여행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그저 체력 거지일 뿐이다.
11시 30분에 오픈인데 우리가 들어간 시간이 바로 11시 30분이었다. 아침부터 그렇게 먹어놓고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합니다.
폭찹과 쌀국수. 국물을 먹으니 너무나 따뜻하고 속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몸뚱아리가 뉴욝시티에 있어도 그냥 나는 천성이 국물 찾아 헤매는 토종 한국인이다. 뉴욝커가 되기는 글러먹었나봐요. 그렇지만 정말 맛있었다. 우리가 다 먹어갈 떄쯤 식당도 점점 사람이 차기 시작했다. 몸을 어느정도 녹이고 난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첼시마켓에 가기 위해 따뜻한 국물과 작별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