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내 얘기부터 해야겠다. 스스로 이 글을 쓰는 것이 많이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맘만먹으면 1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울수 있는(굳이 맘먹지 않아도 된다) 이 위대한 대한민국 입시에서 나름대로 '승자'대열에 낀 사람이다. 남들이 말하는 '좋은 고등학교'를 거쳐 '좋은 대학'을 다니는 내가, '대한민국 입시는 구리다'고 말하면 그건 누군가의 눈엔 '거만한 동정'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 입시에 대해 비판도 아닌 심지어 불평을 쏟아내기엔 적합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밝고 예쁜 것'만을 추구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생애 첫 블로그질인데 두번째로 쓴다는 글이 칙칙하게도 입시에 대한 거라 다소 유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글을 꼭 쓰고싶었던 건, 동생의 눈물이 나를 밑바닥부터 슬프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18일, 고3 동생은 어쩌면 자기 인생에서 가장 부담스러울 시험을 치뤄냈다. 앞으로 살면서 수많은 시험을 치뤄낼테지만, 듣기평가 시간엔 비행기 이착륙도 금지되고 경찰은 수험생 '수송'을 도맡는(세상에 이런 나라가 어디있을까! 다이내믹 코리아 만세!) 이 수능이란 시험은, 심약한 동생에겐 많이 무섭고 무거웠을거다. 컨디션이 좋다며 웃으며 시험장으로 들어선 동생은, 집으로 돌아와 가채점을 하고 나서 하얗게 질렸단다. 엄마는 동생이 많이 울었다고 했다. '내가 이 점수를 받으려고 공부했나'싶은 좌절감과 억울함이 동생을 가만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험이 끝나고 난 후, 붕붕 뜬 기분의 수험생 지갑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길거리 가게의 포스터에서, 마치 명절때처럼 생색내기 발언을 서슴지않는 언론에서, 스카이에 입성한 학생들'만'을 위해 현수막을 내거는 수고도 마다하지않는 치사한 학교에서, 동생은 '수험생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문장을 마주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수고가 결과로 보상받지 못했음을 알게 된 순간, 그 아이가 어떤 좌절감을 느꼈을지는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동생은 그렇게 많이 울었다. 그 아이 인생의 '첫 실패'였다.
나는 교육정책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해하는 바가 별로 없고, 교육학에 대해서도 문외한이라, 학생들을 평가하는 방식에 대해 수많은 똑똑한 사람들의 어떤 논의가 오고갔는지는 잘 모른다. 그동안의 노력을 단 하루만에 점수화하는 수능은 잔인한 시험이지만, 교육행정당국 입장에선 어쩔수 없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수능은 '머리 좋은 놈들을 기가막히게 골라내는 시험'이라고 했다. 그리고 대학은 그렇게 골라진 '머리 좋은 놈'들을 얼른 데려가고 싶었을거다. 학생들의 잠재력 운운하는건 사실 대한민국 현실에선 낯뜨거운 일이다.
그래도 뭐,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골라지지 못한' 이들은 또 자기 인생을 자기 나름대로 펼쳐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들은 앞으로 마주칠 수많은 실패 중의 하나를 경험했을 뿐이고, 이 실패는 인생 크게 봤을 때 실패가 아닐 수도 있다. 난 다양한 감정과 다양한 경험이 한 인간을 성숙시키는데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부족함 없는 환경은 오히려 사람을 부족하게 만든다. 실패도 해보고, 좌절도 해봐야 더 큰 위기 앞에서 의연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동생은 대학입시에서 실패했을지 모르나, 이 경험과 감정은 훗날 동생이 성숙한 인간이 되는데에 약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그 아이가 지금을 씩씩하게 이겨낼 수 있게 도우면 된다. 그리고 너의 수고는 절대로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해주면 된다. 난 개인의 역량과 노력으로 충분히 학벌의 벽은 넘을 수 있다고 긍정하는 사람 중 하나다. 불행히도 이 승자독식의 대한민국 사회는, 패자에겐 그리 녹록지 않은 곳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전국의 수많은 '동생들'은 필요 이상으로 부풀려진 좌절감을 느껴야한다. 그동안의 노력이 원하는 점수로 표현되지 못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 아이들은 자신들을 뒷바라지해준 부모님들에게 죄인이 된 기분을 느껴야 할 것이다. 사방에서 이른바 엄친아와 엄친딸이 넘쳐나는, 이 열등감을 일부러 조장하는 듯한 사회에서 그들은 초라함을 느낄 것이다. 사회가 그들에게 부여한 수많은 편견과 맞서야하고, 뜻도 발음도 경멸스러운 '지잡대생'등의 조롱을 받을지도 모른다. 명문대, 혹은 '인서울 4년제'출신들보다 낮은 평균 임금의 비정규직 일자리(심지어 이런 일자리조차 구하기 쉽지않다더라)는 그들 차지일테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건, 그들이 스스로 그 틀안에 갇히고 그렇게 자신감을 잃는거다. 어쩌면 이들중 누군가는 이 실패를, 그리고 이 실패가 가져온 결과를 평생의 컴플렉스로 짊어질지도 모른다. 인생의 수많은 실패 중 하나일 뿐인데,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심지어 이는 처음 마주친 실패일텐데 말이다. 게다가 이들은 이 모든 것을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 한다. 입시공화국 대한민국은 그제껏 이들을 학교 울타리 안에 꼭꼭 가둬두며 공부만 시켰는데,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갑자기 손에서 이들을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현실과 마주쳐본 적 없는 열여덟,아홉살 남짓의 '동생들'은 이 좌절감을 감당하기 버거울 것이다. 이 어린 친구들에게 이런 식으로 좌절을, 억울함을, 속상함을, 분노를 느끼게 만드는 대한민국의 입시는 그래서 비인간적이다.
2008년에 한 시민단체에서 주최한 강연회에서 교육평론가 이범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주최측에서 내건 '모두가 1등인 세상'이라는 강연제목에 딴지를 걸며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1등인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엔 어쩔수 없이 1등이 있고 꼴등이 있다. 좋은 세상은 1등과 꼴등이 모두 행복한 세상이다'. 이상적인 구호에 불구할지도 모른다. 난 그저, 그 '이상'을 품어볼 시도조차 않는 대한민국이 야속하다.
동생은 시간이 흐르면 더 이상 울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허무한 감정들은 시간이 치료해 줄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난 동생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동생이 울었다는 사실, 그리고 울었어야만 했다는 사실, 그것이 나를 슬프게 할 뿐이다.